[이야기 시] 그날 빨래터에서 생긴 일

입력 2017-09-01 09:39 수정 2017-09-01 14:23
       제위보(濟危寶)

                              이제현


 

빨래터 시냇물 위 수양버들 곁에서

백마 탄 도련님과 손잡고 정 나눴네.

처마 끝 춘삼월 비 잇닿아 내린대도

손끝에 남은 향기 차마 어이 씻으랴.

 

浣紗溪上傍垂楊 執手論心白馬郎

縱有連騫三月雨 指頭何忍洗餘香.

 

 

버들가지 휘늘어진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백마 탄 도련님과 손잡고 사랑을 속삭였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달콤한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손목에 와 닿던 감촉을 생각하면 가슴이 더욱 콩닥거린다. 겨우내 삭은 초가지붕 끝으로 춘삼월 봄비가 줄줄이 내린다한들, 그 빗물로도 손끝에 묻은 임의 향기만은 씻어낼 수 없으리.

그 고결한 향기를 ‘차마 어이’ 씻을 수 있겠느냐는 대목이 이 시의 백미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길래 이런 노래가 나왔을까. 《고려사》 악지(樂志)편 속악(俗樂)에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어떤 부인이 죄를 지어 제위보(濟危寶·빈민이나 행려자들을 구호하는 관청)에서 노역하는 동안 남에게 손을 잡혀도 어쩌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지은 노래’라는 것이다.

아낙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혹여나 애정에 관계된 것이었을까. 어느 날 빨래터에서 만난 남자와 남몰래 정분을 나눈 게 죄가 되고 말았을까. 두 손목을 붙잡고 밀어를 속삭이던 남자는 곧 떠나고 안타까운 체취만 손끝에 남아 아직도 마음을 간질이고 있을까.

익재 이제현(1287~1367)은 《고려사》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멋진 한시로 되살려냈다. 속악에서는 자신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여인의 한탄스러운 마음이 주제였지만, 이제현의 시에선 청춘 남녀의 달콤한 상열지사로 바뀌었다. 노래의 배경이 된 노역장과 빨래터가 다르고, 외간남자와 도련님이 다르고, 어찌해도 씻을 수 없는 손과 차마 씻을 수 없는 손이 다 다르다.

원망스러운 비탄의 아낙네를 사랑스러운 영탄의 봄처녀로 바꾼 시인의 붓끝이 상큼하다. 원래 노래의 가사는 전하지 않고, 이제현의 한시와 창작 경위만 내려오니 궁금증이 더 커진다.

그가 죽은 뒤 목은 이색은 묘지명에서 이제현을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道德之首 文章之宗)’이라고 극찬했는데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의 시는 전아하면서도 웅혼했고 사(詞) 역시 맛깔스러웠다. 충남 보령의 개화육필문예공원에 시 ‘제위보’를 새긴 초대형 시비가 세워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빨래터의 춘정은 사람의 감성을 묘하게 자극한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빨래터 그림만 봐도 그렇다. 젖가슴을 반쯤 드러내고 머리를 감는 여인, 넓적다리를 다 내놓고 빨래하는 여인, 그 모습을 돌 틈에서 훔쳐보는 사내….

실제로 빨래터에서 이뤄진 사랑도 많다. 황진이의 어머니도 열여덟 살 때 다리 밑에서 빨래하다 만난 남자와 눈이 맞아 그녀를 낳았다.

고려 태조 왕건 역시 빨래하는 처녀에게 동해서 아들을 얻었다. 여자의 출신 성분이 낮아 임신을 원치 않았기에 돗자리에 사정했지만, 전날 용꿈을 꾼 그녀가 재빨리 정액을 쓸어 넣었다고 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혜종이다. 어설픈 인공수정 때문인지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돗자리 대왕’으로 불렀다고 한다. 물론 야사에 나오는 얘기다.

내친 김에 이제현의 《역옹패설》식 입담을 빌려 우스갯소리 한 자락을 덧붙여본다. “아, 그 양반 성미가 조금만 더 급했더라면 ‘돗자리 대왕’이 아니라 ‘빨래판 대왕’이 나올 뻔했네 그려!”

 
고두현/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거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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