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의 사운드 오브 뮤직] (5) 죽었지만 살아있는 '전설의 래퍼' 투팍

입력 2017-08-29 16:41 수정 2017-08-30 09:21
Tupac Shakur 1971~1996년


젊은 시절 랩을 하는 투팍 모습. (사진=투팍 공식사이트)
"당신의 최신 음반 'Me Against The World'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음반이 1위를 기록한 최초의 가수가 됐습니다." (영화 '올 아이즈 온 미' 한 장면)

투팍 샤커(일명 2Pac)는 스물 넷이던 1995년, 뉴욕 클린턴교도소에 수감중이었습니다. 그 무렵 성폭행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 있었습니다. 투팍 주변인 중 한 남성이 흑인 여성을 강간했기 때문인데요. 그와 같은 호텔방에 머물렀던 투팍이 대중가수라는 유명세로 인해 범인으로 몰렸던 것이죠. 투팍이 재판을 받을 무렵 세상에 나온 세 번째 음반은 미국인들이 불티나게 구입했습니다. 음반은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랐습니다.

투팍은 1990년대 힙합 뮤지션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었습니다. 랩 가수가 된 이후에도 잦은 폭행 사건을 일으키는 등 갱스터와 같은 거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탔고, 그의 랩음악이 빌보드 차트를 휩쓸면서 세계적인 힙합스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안타깝게도 투팍은 불과 25세 나이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짧은 일기 동안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을 살았고 결국 그의 이야기가 전기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최근 국내 극장에서 투팍의 일생을 다룬 영화 '올 아이즈 온 미(All Eyez On Me)'가 상영중입니다. 대학 시절 힙합을 좋아했던 기자는 지난 26일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영화를 봤습니다.

투팍의 부모는 1960년대 급진적인 흑인운동단체였던 블랙팬서(흑표당) 당원이었습니다. 영화는 1971년 뉴욕을 배경으로 아페니 샤커(투팍의 엄마)가 석방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아페니는 1969년 블랙팬서 당원들과 뉴욕 폭탄테러 모의 혐의로 체포돼 수감됐다가 변호사 없이 스스로를 변호해 8개월 만에 무죄로 풀려났지요. 당시 스물 셋이던 아페니는 투팍을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투팍의 모친 아페니 샤커. (사진=투팍 공식사이트)

투팍은 어릴 적부터 가난하게 성장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친부는 곁에 없었고 아페니가 흑표당 활동으로 만난 양아버지(무툴라 샤커)와 함께 살았습니다. 무툴라와 아페니는 흑인 운동을 했던 탓에 집에는 백인 경찰들이 자주 드나들었지요. 이로 인해 투팍은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을 겪었고, 거리의 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페니는 투팍의 유년시절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투팍이 어른이 돼 흑인 빈민촌의 실태를 고발하는 메시지를 랩 가사로 담고, 백인 경찰들이 가난하고 죄없는 흑인들에게 폭력을 일삼는 모습을 종종 노랫말로 쓴 이유가 혁명가로 일한 모친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986년 모친과 함께 뉴욕에서 볼티모어로 이사를 간 투팍은 예술학교에 다니면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좋아하고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투팍은 예술학교에서 첫 사랑 제이다 핀켓(훗날 윌스미스 아내가 되는 배우)을 만났지만 그와의 우정도 잠시, 이듬해 캘리포니아 오클랜드로 다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오클랜드의 뒷골목 동네는 무법천지였습니다. 살인은 밥 먹듯이 벌어졌고, 마약에 손대는 어른들도 많았지요. 아페니 역시 마약에 빠져 투팍과 잦은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투팍은 오클랜드에서 힙합 모임을 하면서 랩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10대 후반의 나이에 오디션을 통해 랩그룹 '디지털 언더그라운드'에서 랩을 할 기회를 얻습니다. 투팍은 무대에 올라 관객들을 만나면서 그때부터 랩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나갔죠.

1991년 투팍은 디지털 언더그라운드에서 나와 솔로 앨범 '2Pacalypse Now'을 발표합니다. 투팍 이름으로 나온 첫 앨범이었죠. 투팍의 재능을 눈여겨본 인터스코프(Interscope) 레코드사와 계약을 하고 낸 음반이었습니다. 음반사 경영진이 투팍을 회사로 불러 불편한 노랫말이 들어간 곡을 빼고 앨범을 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문제의 곡이 투팍의 첫 번째 빌보드 히트곡이 된 'Brenda’s Got a Baby'였죠. 열두살 어린 소녀가 강간을 당해 임신을 하고 거리를 헤매다 죽어간다는 참혹한 이야기는 듣기에 거부감이 들 정도의 가사를 담고 있었습니다. 투팍은 아티스트의 자유를 강조했고 이 곡이 빠지면 앨범을 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습니다. 결국 음반사 경영진은 투팍의 의지를 꺾지 않았고 앨범은 미국 내 100만장 넘는 판매고를 올렸지요.

투팍은 선정적인 노랫말을 써 여성 단체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한편으론 여성들을 격려하고 존중하는 메시지를 가사로 쓰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 무렵 힙합계에 '갱스터 랩'이란 말이 유행했을 정도로 거칠고 과격한 노랫말을 담은 랩음악이 많았지만, 투팍의 음악은 여성들마저도 호감을 갖게 된 배경이 됐습니다.

투팍이 랩스타로 명성을 얻었지만 한편으론 사회적 문제아로 공격받습니다. 당시 미국 부통령 댄 퀘일은 TV에 나와 공개적으로 투팍의 사생활이 아주 위험하다고 비판했습니다. 투팍이 폭행 사건에 자주 연루됐기 때문인데요. 1994년에는 동부 힙합을 대표하던 래퍼 크리스토퍼 '비기' 월리스(일명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의 초청으로 맨해튼 타임스퀘어 빌딩에 있는 녹음실로 가다가 괴한들이 쏜 총탄 5발을 맞습니다. 이는 동부와 서부 힙합 진영을 대표하던 투팍과 비기의 갈등을 초래한 사건이 됐습니다.

1995년 수감중이던 투팍을 감옥에서 꺼내준 인물은 닥터 드레와 스눕 독 앨범으로 많은 돈을 벌었던 데스 로(Death Row) 레코드 사장 슈그 나이트였습니다. 그는 우리 돈으로 15억원에 달하는 보석금을 주고 투팍을 감옥에서 빼내지만, 그 댓가로 데스 로와 3장의 음반을 내자는 계약을 제안했습니다. 투팍을 소속 가수로 두고 막대한 돈을 벌려는 속셈이었지요. 1996년 세계적인 히트곡이 된 'California Love'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새 소속사로 옮긴 투팍은 닥터 드레와 함께 작업한 이 노래로 전성기를 보냈지요.

힙합 역사상 처음으로 2장짜리 음반으로 나온 '올 아이즈 온 미'는 여러 히트곡을 냈고 투팍을 최고의 힙합스타 반열에 올려놨습니다. 하지만 비극은 1996년 9월7일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날 밤 마이크 타이슨 권투 시합을 보러 간 투팍은 경기가 끝난 뒤 슈그 나이트가 운전한 BMW 7시리즈를 타고 타이슨이 초청한 나이트클럽으로 가던 길에 흰색 캐딜락을 탄 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4발의 총상을 입었습니다. 투팍은 총에 맞고 6일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눈을 감았습니다.


투팍을 연기한 드미트리 쉽 주니어.  (사진=영화속 장면)

투팍의 전기 영화는 영화 평론가들에게 연출력이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힙합 팬들은 약 1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분명 반가운 필름이었습니다. 영화 제목은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발표한 4집 음반의 타이틀에서 따왔습니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유명한 베니 붐이 메가폰을 잡았고, 투팍과 몹시 닮은 신인배우 드미트리 쉽 주니어가 투팍을 연기했습니다.

누가 투팍을 진짜 죽였을까요. 투팍이 사망한지 20년이 넘었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은 미결로 남았습니다. 투팍은 사망하기 전까지 713곡의 노래를 만들었고 7편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그가 발표한 9장의 앨범이 플래티넘을 따냈고 지금까지 전세계 7500만장이 팔려나갔습니다. 투팍은 힙합 아티스트로는 여섯 번째이자 솔로 랩가수로는 처음으로 201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김정훈 기자 lennon@hankyung.com
필자는 한경닷컴 뉴스국에서 자동차 업종을 취재하고 있다. 자동차 드라이브를 무척 좋아하지만 음악과 공연을 더 즐긴다. 글방을 통해 음악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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