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키나와 (16)...이치카와의 비밀

입력 2017-08-29 09:20 수정 2017-08-29 20:13


이수와 우타는 가잔비라 고사포진지에서 조금 내려와 가키하나 둔덕에 걸터앉아 말없이 나하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부상병을 찾는 사이 주변이 더 깜깜해져 나하는 그야말로 불바다로 변해갔고, 솟아오른 연기기둥은 검은 하늘에 뒤섞여버렸다.  저 불꽃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숨겨뒀던 귀중품과 고귀한 기억들이 재와 연기로 사라져가고 있을까? 일기장 하나, 가구 하나, 안경 하나, 사진 한 장, 책 한권이 생명처럼 소중할 수 있는데...도시 전체가 저렇게 힘없이 불타버리다니. 이제 두 사람은 시내를 내려다보다가 기이한 ’불꽃놀이’ 연출에 의해 연기해온 ‘무대’에서 떠나고 싶어졌다.

“실례합니다만, 마실 물 좀 없소?”

두 사람이 ‘무대’에서 내려서려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이수와 우타는 깜짝 놀라서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뒤돌아보니 거기 일본군 부상병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위계급장을 달고 있는 그는 폭탄 파편을 맞았는지, 오른팔의 손목과 팔꿈치 사이에 피가 젖어들고 있었고 혼자 옷을 찢어 팔을 싸매는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아직 피가 제대로 멎지 않은 상태였다. 이수는 오키나와 전선에 파견된 소위라면 어느 부대의 ‘중대장’일 거라고 판단하고 우타에게 소리쳤다.

“우타, 중대장님을 잘 보살피고 있어. 내가 아까 그 의료품상자 도로 가져올게”

이수는 가잔비라 언덕을 급하게 뛰어 올라가, 아까 포신 아래 내려놓았던 그 보급품 상자를 챙겨서 언덕 아래쪽으로 달려왔다.

“중대장님, 괜찮으세요?”

단숨에 보급품 상자를 되찾아온 이수는 물 대신 상자 속에 마지막 남아있던 정종 한 병을 따서 소위에게 건네주며, 재빨리 붕대뭉치와 소독약을 꺼냈다. 중대장은 “고맙다”며 왼손으로 정종 한 병을 물마시듯 단숨에 다 비우더니 빈병을 언덕 아래로 휙 던져버렸다.

우타는 이수가 의료품을 가지러 가는 사이 주변에 흩어져 있는 나무 막대기를 주워와 부러진 소위의 오른팔을 고정할 준비를 해놓았다. 이수가 소독약과 붕대를 꺼내놓자 우타는 세련된 솜씨로 소위의 팔을 짜 맞추었다. 소위는 팔에 금이 가 극심한 고통이 느껴질 텐데도 어금니를 깨문 채 “음 솜씨가 좋은데...”라고 칭찬하며 그 통증을 꿋꿋이 참아냈다. 우타는 소위의 팔을 단단히 장착시킨 뒤, 붕대를 목에 걸어 팔이 흔들리지 않게 고정해주었다. 소위는 우타가 처치를 마치자마자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며 벌떡 일어섰다.

“자, 이제 각자 원대로 복귀하지”

소위가 일어서서 메이지다리쪽으로 발을 옮기려 할 때 우타가 중대장을 큰 소리로 불렀다.

“중대장님!...바로 저 아래 야마시타에 우리 고모가 살고 있는데, 거기 가서 식사를 좀 하고 가시죠”

빨리 부대로 복귀하고 싶어 걸음을 재촉하던 소위는 우타의 제안에 잠시 멈춰 서서 머뭇거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 그래, 뭐라도 좀 먹고 갈까?”

“네, 천천히 따라 오세요. 제가 먼저 가서 음식준비 해놓을 게요”

우타가 쏜살같이 야마시타쪽으로 달려 내려가자 이수로서는 혼자서 일본군 장교를 모시고 가는 게 좀 마음에 걸렸다. 조선인 군부가 함부로 일본군 장교와 말을 터놓다보면 나중에 어떤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더욱이 피해가 심각한 이 전쟁터에서 조선인 군부가 류큐인 간호사와 함께 있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었다.  팔을 다친 소위는 얼굴에 주름이 진 걸로 봐서 꽤 나이가 들어보였고, 고집이 무척 세 보이는 인상이어서 이수는 끝까지 먼저 말 걸지 않고, 그냥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내려 갔다.

“자넨 어디 소속이야?”

“특설수상근무 제 103중대 소속입니다”

“그래? 거기 중대장 이름이 뭐냐?”

“이치카와입니다”

“음...이치카와 중대장을 아는 걸 보니 스파이는 아닌가보네”

“이치카와 중대장님을 아세요?”

“그럼, 육사출신은 아니지만, 내가 존경하는 선배지...”

“근데 자넨, 무슨 담당이지?”

“군수품 보급담당입니다”

“난 해상정진 2전대 1중대장이야”

“네?, 그럼, 오시타 중대장님이세요?

“그래, 내가 오시타다. 부대로 복귀하면 이치카와 선배께 안부 전해라”

산등성이를 거의 다 내려갈 무렵 우타가 다시 기슭으로 올라오며 환한 얼굴로 두 손을 흔들었다. 우타는 고모에게 저녁을 부탁해놓았다며, 두 사람에게 집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야마시타에 있는 우타의 고모 집은 오늘 폭격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다. 이 연홍색 기와집은 전통적 류큐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지붕에 놓인 시사가 이수를 응시했지만 무서워보이진 않았다. 등불 켜진 집 안으로 들어서자 류큐의 독특하고 진한 흙냄새가 풍겨 올랐다.


<전형적인 류큐식 기와집. 지붕위에 시사가 올려져있다.  사진=이파>

우타의 고모부와 아들은 마리아나 전선에 동원됐기 때문에 지금은 고모 혼자서 산다고 했다. 조그마한 키에 상냥하고 친절한 50대 초반의 우타 고모는 오시타 중대장과 이수를 방안으로 안내한 뒤 부엌으로 사라지더니, 금방 돼지고기가 든 오키나와 소바를 끓여 내왔다. 오키나와엔 삶은 돼지고기가 유명하다지만, 이수로서는 이곳에 와서 오키나와식 삶은 돼지고기를 먹어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었다. 오시타 중대장은 오키나와 소바를 왼손으로 단숨에 비우고 다친 오른 팔을 주무르면서 이수를 노려봤다.

“이봐, 혹시, 자네 서류작성 할 줄 아나?”

“네...”

“그래? 잘 됐군, 내가 지금 오른 팔을 못 쓰니까, 내일 아침 보고할 서류를 작성할 수가 없네. 그러니까, 오늘의 전황보고서를 내가 불러주는 대로 적어줄 수 있게나?”

“네”

오시타 중대장은 우타의 고모에게 백지를 좀 달라고 하더니, 왼손으로 위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은 종이쪽지를 꺼냈다. 그건 오늘 그가 팔을 다치기 이전까지 미군의 폭격회수와 폭격시간, 동원된 전투기의 종류, 폭격지점 등을 요약한 것이었다.


<가잔비라로 가는 길. 미국인들도 여전히 나하전투에 관심이 많다.  사진=이파>

이수는 폭탄이 쏟아지는 험한 가잔비라 언덕에서 깨알 같은 글씨로 전황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적어놓은 오시타 중대장의 치밀함에 놀랐다. 사실 이수는 어떤 사물과 사태를 ‘분류’하는 데는 이력이 나있었다. 왜냐하면 식물학이란 본디부터 ‘분류법’에서 시작된 것이니까. 그래서 이수는 일단 오시타 중대장의 메모를 식물 분류표처럼 도표로 정리했다.  첫 번째 항목엔 미군의 공격시간, 공격기 종류, 목표지점 등을 설정하고, 두 번째엔 일본군의 폭격피해를 지점, 군수물자, 선박, 전투기, 행정기관, 가옥 인명 등으로 나눠 도표를 만들었다. 도표를 작성하는 이수의 손놀림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오시타 중대장이 말을 건넸다.

“자넨 아무래도 대학물을 먹은 것 같군, 어디 다녔어?”

“도다이 다녔습니다”

“전공은?”

“식물입니다”

“이름이 뭐지?”

“이시타 리수입니다”

“...아하, 자네가 바로 그 ‘우친사건’의 주인공이구나”

“예?...네에”

“저번에 이치카와 선배한테 자네 얘기 들었어...”

오시타 소위는 그제야 이수에 대한 의심을 풀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더니 가라앉은 음성으로 얘기했다.

“근데, 자네 이치카와 선배가 왜 전투 부대가 아닌, 군수 지원부대의 중대장을 맡고 있는지 아나?”

“그건, 모릅니다.”

“이치카와 선배는 우리 황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할 때 영웅적인 전투를 벌인 분이야. 황군 3만 명이 영국군 8만 명을 항복시킨 건 알지? 그 전투에서 화약이 눈에 들어가 오른쪽 눈을 실명했지.”

“겉보기엔 표시가 나지 않던데요?”

“음, 겉으론 멀쩡하지만, 오른쪽 눈의 시야가 흐려져 총을 쏠 수가 없게 된 거야.”

“아...그래서, 수상근무대로 오신 거군요...”

“아니, 수상근무대에 오기 전 싱가포르에서 헌병소대장으로 영국군과 중국인을 관리하는 치안업무를 담당했지”

“헌병 소대장으로요?”

“음...쇼난경비대의 악명 높은 헌병이었지...”

그동안 이수는 군조헌병들이 다른 중대장에겐 인사도 잘하지 않으면서, 이치카와 중대장에겐 왜 그렇게 깍듯이 경례를 붙이는지 의아하게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이치카와 중대장은 자랑스러운 싱가포르전투에 대해, 그리고 헌병출신이란 사실에 대해 왜 숨기고 있을까?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15년전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 현지를 꾸준히 찾아가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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