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키나와 (15)...무덤에서 살아나온 사람들

입력 2017-08-24 13:26 수정 2017-08-27 23:00


이수와 우타가 가잔비라로 가는 기슭에 올라서자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져 왠지 두 사람은 ‘가잔비라’라는 초현실적인 연극무대에 등장한 배우가 된 것 같았다. 왜냐하면 저 아래 도시전체가 불타고, 사람들은 모두 방공호 안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 건너편 산비탈에 오직 두 사람만 겁 없이 올라와 비현실적인 연기(演技)를 하고 있는 거니까.

나하 시내의 가옥들이 타들어가는 불꽃 때문에 두 사람이 걸어가는 움직임은 얼룩말의 등판처럼 얼룩덜룩하게 흔들렸고, 나하항 뒤편엔 약 2백미터 길이의 탄약창이 있었는데, 그곳에 쌓여 있던 포탄과 총알이 한꺼번에 다 터지지 않고 불이 옮겨 붙을 때마다 간격을 두고 쿵쾅 거리며 계속 분출했다. 가옥에서 솟구치는 불꽃은 위협적인 연극무대에 이수와 우타를 올려놓고 “히햐, 너희들은 결코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라며 귀신불처럼 계속 혓바닥을 내밀었다.

“우타, 우리처럼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나온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지?”

이수의 질문에 우타는 이수의 팔을 자기의 볼로 짓이기다가 이수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이수씨, 우리가 지금 사람이에요?”

“사람이 아니면...?”

“우리는 아까 사람들이 죽어서 묻히는 무덤 속에서 처음 만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죽어서 영혼끼리 만나 다시 바깥으로 나와, 이렇게 신나게 걸어 다니는 거...아닐까요?”

“하긴, 나도 아까 무덤 안에서 노래 부르기 전에 잠깐 그 생각을 했는데...”

“그러니깐, 우린 ‘기지무나’예요”

“기지무나? 그게 뭐지?”

“오키나와에 사는 천진난만한 정령이죠. 온몸이 분홍색인데 가쥬마루에서 살아요.”

“가쥬마루?, 용수(榕樹)를 말하는 건가?”

“그렇죠. 나하 시내에 큰 나무는 대부분 가쥬마루죠”

미군 함재기가 떨어트린 소이탄에 때문에 나하 시내의 가쥬마루도 모두 불타버릴 것 같았다. 우타의 얘기에 따르면 기지무나는 자기가 기거하는 집 사람들을 도와주며, 물고기의 한쪽 눈을 먹고 산다는데 바다가 저렇게 황폐해져버려 기지무나가 물고기를 잡아먹기도 어려울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지무나는 장난끼가 많고, 잘 웃는다.   사진=이파>

그럼에도 기지무나가 된 두 사람은 광란의 불길을 토해내는 ‘불꽃귀신’과 탄약저장소에서 터지는 폭발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이미 무덤 속을 함께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난 정령이니까. 이때 이수는 정신을 가다듬은 뒤 ‘그래, 우리가 진정 다시 죽을 걱정이 없는 정령이라면, 남을 도와주는 기지무나라면 빨리 고사포진지로 가서 부상자가 없는지 살펴봐야지’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보급품상자를 다시 한 번 동여 메고 걸음을 옮겼다. 이수의 태도를 금방 알아차린 우타도 고사포진지로 올라가기 위해 이수의 뒤를 따랐다.

고사포 진지는 2주일 전에 이수가 보았던 그런 형체가 아니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토치카는 무참하게 부서져 기공이 많은 돌 더미로 변했고, 포병들의 시체들이 다리는 다리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흙더미를 비집고 섬뜩하게 삐쳐 나와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부상자를 찾기 위해 정신없이 고사포진지 아래 일그러진 돌밭을 아래 위를 뒤졌지만, 살아있는 부상병은 찾을 수  없었다.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 때문에 구토증이 오는데도 이수는 포기하지 않고 오로쿠비행장 쪽, 오키나와기상대 쪽, 야마시타 쪽 산비탈을 돌면서 부상병이 있는지 더듬고 또 더듬었지만 하지만 어느 곳에도 부상병은 없었다. 이곳은 독립고사포 제 27대대 제 1중대가 주둔했는데, 이 부대는 지난 6월10일 나하로 왔으며 인원부족을 메우기 위해 오늘 제2고녀 여학생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진지를 구축하기로 했었다. 다행히 시체에 여학생들이 없는 걸로 봐서 여학생들이 도착하기 전에 미군의 폭격과 기총소사가 시작되었고, 폭격이 끝나자 포병들은 시체는 내버려둔 채 부상병을 이송하느라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이수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고사포진지가 있던 꼭대기로 돌아와 부서진 토치카 아래쪽에서 오늘 제2고녀 4학년 여학생들이 작업할 수 있도록 마련해놓은 삽과 곡괭이를 찾아내, 콘크리트와 석회암에 덮여버린 고사포진지 토치카 안을 파들어 갔다. 한참이나 땀 흘리며 돌더미를 파냈지만 토치카 안은 숨 쉴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고, 두 병사의 피 범벅된 시신만 확인할 수 있었다.  로켓포를 얼마나 쏟아 부었으면 이렇게 토치카가 산산조각이 났을까?


<지금도 가잔비라 옛 고사포 진지 자리엔 부서진 돌들이 널려있다.  사진=이파>

다행히 우타는 간호사를 하면서 이미 시신을 많이 보았는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혹시라도 아직 맥박이 뛰는 병사가 있는지 일일이 살폈다. 이수는 우타에게 일단 눈앞에 보이는 사체들을 한군데 모아 덮어주자고 제안했으나, 우타는 시신에 손대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내일, 고사포 중대 병사들과 의무대가 함께 돌아와서 전사자들을 수습할 수 있게 그대로 놓아두는 게 나아요.”

우타는 비전문가가 함부로 시신을 옮겨놓으면 나중에 시신을 수습하기가 훨씬 더 힘들어진다며, 부상자가 없다면 일단 여기를 떠나자고 했다. 이수는 오늘 하루 내내 메고 다니던 보급품상자를 폭격으로 비스듬히 고개 숙인 포신 아래 놓아두고, 우타의 뒤를 따라 뒤틀린 포신처럼 축 쳐진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15년전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 현지를 꾸준히 찾아가 취재해서 썼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

투표보험설계사·택배기사 등 노동3권 보장, 어떻게 생각하세요?

  • 특수형태 근로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교섭을 통해 권익을 보호받을 것 174명 35%
  • 4대 보험 적용 등 고용주의 부담이 늘어나면 일자리가 되레 줄 수도 우려 318명 65%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