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키나와 (10)...날씬한 그녀

입력 2017-08-09 09:50 수정 2017-08-09 11:36


암흑의 공간을 뚫고 들어오는 강한 빛줄기가 조금씩 커졌다. 귀갑묘 입구 위쪽의 주먹만 하던 구멍이 차츰 확대되어 갔다.

손이었다. 알 수 없는 손 하나가 이수의 영역으로 빛의 공간을 넓혀나갔다. 어떤 손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려 하는데도, 이수는 그렇게 공포를 느끼거나 긴장되진 않았다. 미군 전투기는 지금 하늘에 떠 있고, 전투병은 아직 상륙하지 않았으니까, 귀납묘 구멍을 넓히는 사람은 일본군이든가 아니면 나하 주민일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손은 작고 가녀렸다. 그 손이 돌 파편을 밀치면서 안으로 회색 먼지를 불어넣었다.  뜻밖에 귀갑묘 공기구멍 안으로 단발머리 여자가 얼굴을 집어넣다가 어깨가 걸리는 바람에 다시 빠져나갔다. 몸 하나가 들어오기엔 아직 충분할 만큼 넓이가 확보되지 않아 단발머리는 공간을 더 넓히려고 돌 더미를 밀쳐내려 안간힘을 썼다.

이수는 후다닥 일어나 공기구멍의 공간을 더 넓힐 수 있게 단단히 박힌 돌멩이들을 다급하게 헐어냈다.

이때 갑자기 그 단발머리가 굴 안쪽으로 폭발하듯 온몸을 던져 넣었다. 뒤쪽에서 폭탄이 터진 모양이었다. 이수는 반사적으로 반쯤 빠져 들어온 단발머리의 상체를 감싸 안고 확 끌어당겼다.  날씬한 몸매의 단발머리여자가 시커먼 흙먼지와 함께 귀갑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지독한 화약 냄새도 따라 들어왔다.

바닥에 쓰러진 단발머리 여자는 돌바닥에 엎드린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수는 말없이 그냥 기다렸다.

탈출이란 항상 장벽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가는 걸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처럼 극심한 혼돈의 공간에선 넓은 공간에서 더 좁은 공간 속으로 도망치는 게 탈출이란 걸 깨달았다.


<이수가 기총소사를 피해 뛰어든 귀갑묘. 4각형 문을 떠밀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사진=이파>

귀갑묘 안으로 소리는 들어오지 못했지만, 빛은 그 안으로 소리 없이 숨어들었다. 대낮의 빛은 폭격기의 그늘을 뚫고 좁은 출입구를 통해 무대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처럼 벙커 안의 한 부분을 강하게 조명했다.

간호복 윗도리에 바지를 입은 단발머리는 한 차례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며 허리를 움츠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먼지를 털거나 머리카락을 훔치거나 하지도 않고 곧장 허리를 세워 앉더니 이수의 얼굴을 말끔히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폐쇄적인 장소에서, 이런 당황스런 상황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처음 마주치면 두려운 표정을 짓거나, 사태를 얼버무리기 위해 뭔가 중얼거릴 것 같은데 열아홉 살쯤 돼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는 상대의 눈길을 전혀 피하지 않고 깊고 커다란 눈으로 이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쳤어요?”

이수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말이 먼저 튀어나올 줄은. 폭탄을 피해 귀갑묘안으로 온몸이 부서질 만큼 던져 들어온 사람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상대방에게 다쳤느냐고 물어보다니.

물론 이수의 턱과 목에 코피가 조금 묻어있어 그랬겠지만, 전혀 예측하지 못한 질문 때문에 이수가 오히려 말을 얼버무렸다.

“코피가 터져서...”

이렇게 대답을 하다가, 그는 자신의 귀가 다시 들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그녀를 똑 바로 쳐다봤다.

가늘고 긴 목, 그 위에 팽팽한 작은 얼굴, 짙은 눈썹과 깊이 들어간 눈, 선명하게 솟은 입술곡선, 그 얼굴 위에 그려놓은 검은 먼지 흔적과 이마를 가로 지르는 숯 자국, 그 어느 것도 이수에겐 생소하지 않은 게 없는 형상이었다.

그 형상은 더 추락할 곳도 더 도망칠 곳도 없고, 죽어서야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무덤’이라는 이 동떨어진 공간속에서 한 가닥 빛줄기처럼 맑은 생기를 뿜고 있었다.

“코피도 코피지만...왼쪽 턱밑이 찢어졌어요.”

이수는 턱밑을 만졌지만 상처를 찾는 데엔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이 파멸의 도시 한 비탈에서 아직은 생명의 끄나풀이 붙어있지만, 곧 몸 전체가 언제 산산이 흩어질지 모르는 나약하고 초라한 사나이가 턱밑이 좀 찢어졌다고 관심가질 리가 없었다.

근데, 어떻게 갑작스레 개미구멍을 통해 들어온 이 여자가 어떻게 남의 턱밑 작은 상처에 까지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수통 좀 주세요”

이수는 허리에 찬 수통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수통의 물로 적시더니 가까이 다가와 이수의 목과 턱을 닦아준 뒤 허리에 찬 간호주머니에서 소독약을 꺼내 소독해주었다.

지금 바깥세상은 불덩이처럼 검붉게 타오르고 있는데도 두 사람은 개미구멍을 하나 뚫고 들어와 공격의 세계에서 탈출한 덕분에 내습하는 불길을 피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기운은 서서히 파괴의 열기를 가라앉히며 색다르고 싱싱한 기운을 발산했다.

오키나와에 끌려온 이후 이런 생기에 익숙하지 않은 이수는 혹시라도 두 사람 사이에 서먹한 시간이 다가오지 않을까 망설였다. 생소함을 떨치기 위해 이수는 무슨 행동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이수는 불바다가 된 바깥세계의 사정이 너무나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빛이 들어오는 구멍 쪽으로 향해 기어갔다. 귀갑묘의 천정이 꽤 높은데도 여전히 기총소사의 공포에 짓눌려 허리를 구부린 채 밖을 내다보기 위해 귀갑묘 구멍으로 다가갔다.


<오키나와 출신 연예인. '우타'는 누구와 닮았을까?  사진=일본 프리화상>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15년전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 현지를 꾸준히 찾아가 취재해서 썼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

투표보험설계사·택배기사 등 노동3권 보장, 어떻게 생각하세요?

  • 특수형태 근로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교섭을 통해 권익을 보호받을 것 254명 36%
  • 4대 보험 적용 등 고용주의 부담이 늘어나면 일자리가 되레 줄 수도 우려 443명 64%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