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키나와 (9)...이상한 곳

입력 2017-08-08 11:43 수정 2017-08-15 17:53


이수는 폭격이 잠시  멈추자 나마가와(並川)금물점을 지나 돈도초를 향해 뛰었다. 달리는 동안 그는 길가에 갈기갈기 찢어진 일본군의 처참한 시체들을 보았으며, 부상당해 거리를 이리저리 헤매는 군인들과도 마주쳤다.

“그래도, 나는 가잔비라로 간다”

폐허로 변해가는 거리를 지나 이수는 메이지다리 북쪽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가잔비라 언덕으로 올라가자면 북쪽메이지다리와 남쪽메이지다리 2개를 건넌 뒤 가키노하나 언덕을 넘어가야 하는 데 그때까지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없어보였다.


<이수가 건너야 했던 메이지다리. 옛날엔 북교 남교 2개였지만 지금은 1개다. 사진=이파>

2개의 다리 사이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왼쪽은 오노야마, 오른쪽은 오모노구스쿠다. 이 섬에선 잠시 폭격을 피할 틈새를 찾을 수 있지만, 다리를 건너는 사이 전투기에게 발견되면 이수의 삶은 한순간에 끝나고 만다.

그래서 이수는 교두보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금 올라가야 할 가키노하나 언덕을 올려다봤다.

거기도 이미 폭격을 받은 듯 잔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뒤편 오로쿠비행장엔 검은 연기가 여러 개의 움직이는 기둥을 형성했다. 그럼에도 그는 가잔비라로 가기로 거듭 다짐했다.

“아직 살아남은 병사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가서 이 보급품을 전달해야겠다.”

이수는 어깨에 멘 보급품상자의 짐 끈을 단단히 졸라맸다. 어쨌든 5분 안에 이 북쪽메이지다리와 남쪽메이지다리 2개를 다 건넌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그건 함재기들이 다시 연료공급을 받고 포탄을 장착한 뒤 돌아오는데 적어도 30분 이상 걸렸던 걸 계산한 거지만 그건 그저 독단적인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이 다리에서 공습을 받으면 난 끝장이닷”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며, 이수는 몸을 메이지다리위로 내던졌다. 적으로부터 완전히 노출된 공간을 혼자서 유유히 달리는 이 극도의 긴장감. 몇 초 뒤엔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는 삶의 거친 숨소리.

그럼에도 이수에겐 이상하게 등에 맨 상자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몸도 가벼워졌다. 북쪽메이지 다리 절반을 지났을 쯤엔 결국 그의 몸은 사라지고 정신만 바람처럼 다리 위를 달렸다.

“몸이 왜 이렇게 가볍지?”

뛰면서 이수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는데, 피부가 땀에 흠씬 젖어있음에도 온통 소름이 오글오글 돋아있었다. 더욱 신기한 건 앞만 보고 달리는데도, 사방이 모두 훤히 보이고, 눈과 귀가 동시에 작동하면서 모든 방향에서의 움직임이 한꺼번에 몸속으로 전달되어 왔다. 이수는 이런 ‘극도의 공포’를 이겨내는 경계심에 대해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이런 걸 ‘초월적 경계심’이라고 하면 어떨까?”

이제 그는 거친 숨소리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들리는 공습기의 프로펠러 음향도 몸으로 느길 수 있게 되었으며, 함재기의 연한 소리만 듣고도 지금 어디쯤에 비행기가 다가오고 있고, 또 어떤 비행기가 날아오는지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첫 번째 다리를 다 건넜을 때, 또 한 번 심한 공포가 밀려왔다. 앞으로 건너야 할 남쪽다리가 시간적으로 봐도 곧 폭격될 거 같았다. 초월적 경계심이 그에게 속삭였다.

“이제 오른쪽으로 꺾어 오모노구스쿠의 호(壕)안으로 일단 피신해요!”

하지만 그의 의지는 초월적 경계심을 끝내 거절하고, 남쪽메이지다리를 향해 내달렸다.

이수가 이 남쪽 메이지다리를 건너기로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잔비라 진지에 가기 직전 가키노하나 기슭에 오키나와식 귀갑묘(龜甲墓)가 하나 있는데, 그곳은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일 거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이수는 가잔비라진지에 포탄을 나르며 그 귀갑묘를 발견했는데, 그때 왠지 저기가 이상하게 ‘숙명적인 곳’이라고 여겨졌다.

오키나와식 귀갑묘는 석재로 지어진 거북이 등짝 모양의 묘지로 몇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석재로 쌓은 공간이어서 웬만한 폭격엔 무너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벙커였다.

그러나 상황은 이수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남쪽메이지 다리를 건너긴 했지만 가키노하나 언덕에 있는 귀갑묘를 10미터쯤 앞뒀을 때, 멀리서 그루먼 편대의 진격소리가 뒤통수에 감전되었다. 이젠 초월적 경계심이 ‘초월적 체력’으로 바뀌어야 할 단계였다. 그러나 초월적 체력도 미군 함재기의 속도를 결코 능가할 순 없었다.

“아, 이게 마지막이구나!”

가키노하나 언덕에 있는 귀갑묘를 3미터 정도 앞두고 이수는 그루먼의 기총소사를 받았다. 바로 귀 옆으로 여러 발의 총알이 스쳐지나가며 먼지를 튀겼다.


<나하를 공격하는 미군 전투기. 사진=미국 국립문서관, 나하박물관>

그는 귀갑묘의 석문을 밀치며 온 몸을 날려 무덤 안으로 뛰어들었다. 뒤 따라오던 그루먼 2대가 이번엔 귀갑묘 입구에 기총소사를 했다. 날아 들어온 총알들이 바닥에 튕겨 귀갑묘 벽에 부딪친 뒤 돌바닥에 탁탁 소리 내며 떨어졌다.

묘지 안 돌바닥에 엎어진 그는 한참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몸 어디엔가 총을 맞았을 것 같아 그는 허리를 천천히 돌리면서 몸에 총알 맞은 곳이 없는지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그걸 다 확인할 틈도 없이 이번엔 함재기가 한 대가 귀갑묘 앞에 로켓포를 발사했다. 로켓포가 폭발하면서 귀갑묘의 문은 돌 더미와 흙으로 묻혀버렸다.

미군기는 이수가 군복을 입었기 때문에 귀갑묘를 일본군 토치카로 착각한 게 틀림없었다.

지독한 암흑 속에서도 이수는 몸을 계속 더듬어 보았다. 몸에 총알을 맞은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이수는 겨우 기운을 차리고 귀갑묘 문 쪽으로 가서 손으로 흙을 긁어내 공기가 통할 수 있는 주먹만 한 구멍을 하나 뚫었다.

작은 구멍에서 가느다란 빛이 새어들어 오자, 그는 자신의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로켓포 폭발에 따른 공기압력과 굉음이 그의 귀를 멀게 한 거였다.

귀갑묘 바닥을 내려다보니 그토록 힘들게 메고 왔던 보급품 상자는 절반이 부서졌고, 정어리통조림 하나가 귀납묘 바닥에 뒹굴었다.

“아, 저 통조림이 내 눈에 보이니까, 아직 난 살아있어”

그는 귀갑묘의 돌바닥에 길게 누었다. 온몸을 긴장시키던 모든 경계심이 허물어지자 그는 의식을 잃고 폭 꼬부라졌다.
이파(李波)...소설가.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한 이 장편소설은 징용으로 끌려간 천재 식물학자와 오키나와 간호사의 애타는 사랑이야기다. 두사람은 일본군의 횡포와 미군의 폭격 틈바귀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한 포기의 산호를 더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소설은 필자가 15년전 일본에서 대학교수 하던 때부터 도쿄도서관들을 뒤지고, 오키나와 현지를 꾸준히 찾아가 취재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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