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열한 삶의 현장은 어딜가나 목격할 수 있다.그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조금도 과장없이 절실하게 사는 모습들이야말로 그 어떤 철학보다도 숭고하다는 생각까지 들곤한다.이번에 소개하고 싶은 주인공은 야채가게 형님 부부의 얘기다.정확히는 기억은 안 나지만 이 가게를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쯤이다.재건축이 예정된 아파트 앞에서 부부가 성실하게 야채를 팔더니 끝내 소원을 이뤘다.부인은 가게를 맡고 남편은 오토바이 배달을 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었다.하지만 워낙 가진 것 없이 시작한 터라 가계 월세를 내고 어린 자녀들을 키우다 보면 버는 돈은 한계가 있었다.호탕한 성격 탓에 아파트 주민들을 상대로 정직하게 장사를 하다보니 속도는 느렸지만 가게 형편은 차츰 나아졌다.그러다가 주인이 가게를 싸게 내놓자 형님 부부는 한참 고민을 했지만 큰 맘 먹고 인수하기로 결정했다.그뒤로 하늘이 도왔는지 야채가게는 장사가 잘돼 생각보다도 빨리 빌린 돈을 갚았고 결국 자신의 명의로 소유권을 이전하게 됐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을 무렵 야채가게 옆집인 40평짜리 식당이 급매물로 나왔다.복덕방에 내놨지만 상가가 좀처럼 쉽게 나가질 않자 형님은 주판 알을 굴린 끝에 주인을 만나 단판 승부를 내기로 작정했다.이곳에다 친정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물려 받은 아내에게 칼국수집을 낼 심산이었다.인근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서 결국 상가를 매입해 놓고 한동안 후회도 해봤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결국 죽기 살기로 매달린 끝에 이제는 어엿한 상가 2채를 소유하게 된 사장님이 되는 순간이었다.환갑을 이미 훌쩍 넘길 때까지 오토바이 배달을 했던 형님은 이젠 무릎관절이 안 좋은 탓에 야채 배달은 포기해야만 했다.그러나 매달 상가 두 곳에서 나오는 수백 만원의 월세만으로도 노후 생활하기엔 걱정이 없을 정도가 됐다.말년에 복이 넝쿨째 굴러 왔는지는 몰라도 알짜배기 상가 주인이 된 이들 부부가 사는 낡고 오래된 재건축 아파트가 최근들어 가격이 천정부지로 상승했다.게다가 상가 60평도 현재 시세로 치면 10억대에 육박했지만 여전히 소탈하고 검소하게 산다.결국 이들 부부처럼 욕심부리지 않고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열심히 일한 결과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 “사람들은 대개 60대가 되면 인생의 끝이라고 여겨요. 하지만 60대는 타인에게 휘둘리던 젊은 시절과 달리 내가 나를 믿어줄 수 있는 나이거든요. 젊은 시절 누리지 못한 행복도 깨닫게 됩니다. 젊을 땐 육체적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 정신적 즐거움을 행복으로 느끼기 시작해요. 내가 나를 믿을 수 있고, 나와 사회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때가 인생에서 제일 귀한 나이입니다. 저는 그게 60~75세라고 생각해요. 그 이상 가면 더 좋고요.”

 

최근 베스트 셀러가 된 책 <백년을 살아보니>를 펴내고 인터뷰한 1920년생 김형석 연대 명예교수의 얘기다.과연 오래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일까.아니면 비극으로 향하는 운명적인 재앙일까.이런 나의 궁금증에 김교수는 이렇게 조언한다.“나는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100세 인생을 대비했어요.은퇴후에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만족을 뒤로 미뤘지만요.내가 과연 언제까지 직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그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의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라고 봤거든요.따라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시기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줄 때 악착같이 저축을 해야 했지만요.보험,연금,적금,주식,주택 등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안락한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자산을 끌어 모았죠.지금도 억척스럽게 절약하며 아끼며 사는 것이 훗날 기력을 잃게 되었을 때 조금이라도 풍요롭게 여유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요.결국 그 막연한 미래를 신뢰하며 현재의 행복에게 양해를 구하며 살아왔다고 볼 수 있어요”

 

# 웬만큼 이름이 알려진 번역가라면 한 두 권의 저서쯤은 기본이다.대한민국에서 번역가이면서 작가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들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 김욱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노인일 뿐이다.그는 올해 나이로 88세다. 여든 여덟이라면 당연히 현역에서 은퇴해도 한참 전에 은퇴했을 나이다. 동년배 중에서 아직도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찾으라면 눈 씻고 찾아봐도 찾지 못할 것 같다.솔직히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가 유일한 현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는 나이 70세를 앞둔 나이에 느닷없이 젊은 시절 간직했던 문학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났다.그래서 전원주택을 짓고 남은 인생을 작가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결국 경기도 화성에 수십 년 신문기자 생활을 하면서 평생 모은 재산을 들여 새 집을 건축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호텔을 짓고 있던 건축업자인 지인에게 집을 담보로 내준 것이 화근이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갑자기 불어닥친 IMF로 시공업체가 부도가 나면서 그의 집은 결국 경매로 날아갔다.수중에 남은 단돈 300만 원을 달랑 들고 하는 수 없이 묘막살이를 시작해야만 하는 처지까지 몰렸다.

 

“남의 집 조상 묘를 관리하고 시제(時祭)를 차리는 조건으로 농가주택에서 살 수 있었죠. 하지만 그것도 시제를 딱 세 번 차리고는 쫓겨 났지만요. 나이가 많아 더 이상 맡기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죠.”사실 그는 번역 말고도 지금까지 아홉 권의 책을 낸 작가다. 수년 전에 <가슴이 뛰는 한 나이는 없다>를 펴낸 데 이어 지금은 은퇴를 눈앞에 둔 베이비 부머들을 위한 내용으로 한창 집필중이다. 젊은 시절엔 인생관으로서 문학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열정으로 가득찬 문학 청년인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단다.그는 “지금 건강 상태로 봐서는 110세 까지는 살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당장 95세까지는 지금처럼 번역 일을 계속 하겠다”면서 강한 자신감을 내보인다. 톨스토이의 저서 <인생이란 무엇인가>와 다자이 오사무의 주옥 같은 단편들은 꼭 번역해보고 싶단다. 그리고 나이 아흔 다섯쯤에 중국어를 공부하겠다면서 호언장담을 하는데 실로 대단한 노욕(?)이다.

 

# 살다보면 주변에선 ‘몇 살 정도가 되면 당연히 은퇴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다. 어느 사회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나이에 관해 고정적인 틀을 갖고 있다. 애슈턴 애플화이트가 쓴 책 <나는 에이지즘(ageism)에 반대한다>에서 나이에 관한 통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해 온 작가는 집필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다시 되묻는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노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왜 그렇게 변함없이 암울하기만 할까요?”지금처럼 기대수명이 100세인 초고령화 사회를 살면서 나의 생각을 가두는 것 가운데 하나가 ‘연령차별(ageism)’이다. 에이지즘은 지난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성차별과 인종차별 반대운동과 더불어 일어난 ‘연령차별’ 철폐운동을 말한다.이 단어는 <왜 살아남는 것일까>라는 저서로 유명한 노인의학 전문의 로버트 버틀러 박사가 지난 1969년에 처음 만들어 낸 용어다.쉽게 말해서 ‘노인, 노년 그리고 나이 드는 것 자체를 대하는 편견에 찬 태도들의 조합’을 일컫는다.

 

그의 주장대로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젊은 사람보다 잘한다’든지 ‘나이에 비해서 생각보다 훨씬 건강하다’ 등과 같은 표현은 모두 ‘연령차별’ 사례에 속한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그렇다면 당신은 은퇴를 언제 하실 거죠?’라고 묻는다면 어떤 사람도 시비를 걸지 않는 것이 정상이란다. 88세의 민속 예술가 마샤 무스는 “평생 살아보니까 70대보다 80대인 지금이 오히려 훨씬 더 행복해요”라고 말한다. 결국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정작 필요한 것은 ‘연령차별’이라는 선입견과 어떤 의견이나 행동에 대해 단호하게 ‘그건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는 용기란다. 한마디로 저자는 “인종차별이나 성 차별과 마찬가지로 ‘연령차별’ 역시 사회적으로 구축된 통념”이라면서 강력하게 반박한다.

 

# 사실 내 주변에서 60~70대에도 일하는 사람을 두고 많은 이들은 돈만 밝히는 일의 노예라며 못마땅하게 여긴다.그러나 대다수 고령 근로자가 일하는 이유는 당장 생계문제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 일 자체를 즐기기 위한 이유도 분명 따로 있다.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현역에서 활동 해야겠다는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는 이미 필수조건이 됐다.적어도 기대수명 100세 초고령화 시대를 살고 있는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그렇다면 편견에 사로잡힌 나부터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연령차별’에 눈을 뜨고 ‘나이 듦’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 됐다.나이를 떠나서 좀 더 촘촘하게 사고하고 수용함은 물론이고 동시에 늘 깨어 있어야 하고 긍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처럼 불확실성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더 오랫동안 일하고 더 오랫동안 현직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확고한 신념이 필요한 시점이다.이 대목에서 버틀러 박사는 노인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자신을 혁신하고 다양한 건강 습관 만들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지요. 다만, 유전자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약 25%에 불과해요. 75%는 환경이나 행동에 영향을 받습니다.”결국 제아무리 젊음과 효율에 가치를 두는 산업사회라고는 하지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사실, 밥벌이를 떠나서 결국 부족한 자아(自我)를 채우고 성장시키는 데에는 이만한 훈련도 없다.어쩌면 ‘나이 듦’이 나 같은 평범한 인생들에겐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싶다.아직 100세까지는 못 살아봤지만.

 
윤국열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키움에셋플래너 경제교육 본부장
•경실련 상임집행위원 / 대전참여연대 집행위원
•법무보호복지공단 사회성향상 교육위원
•대전시 시민행복위원회 위원
•ING life 부지점장 / Allianz Life 지점장 / TNV advisor 본부장
•대전대학교 경제전문가과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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