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딸도 아닌 나와 아이의 삶 속으로

입력 2016-10-17 09:54 수정 2016-11-04 09:19

아이가 교회 유치부에서 자신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준 사람에게 선물해주는 등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하며, 엄마에게 '사랑합니다'를 붙여 등을 선물해줬다.

 

나이 들수록 살아가는 게 녹록치 않다. 하루 하루 몸도 마음도 더 풍요로워질 것을 기대했지만, 삶의 더께는 더욱 두터워지는 듯 하다. 육체의 나이가 들수록 에너지마저 부족해지니 때때로 삶은 즐거움보다 의무 투성이처럼 느껴지곤 한다.

햇수로 17년의 월급쟁이 생활을 마치고 꿈에 그리던 박사과정에서 학생으로 살아가는 과정은 상상과는 달랐다. 가장 큰 미션은 나 자신과 진정으로 마주하는 것 아니었을까. 어느 조직의 일원으로 주어진 틀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내는 데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무소속에 가까운 학생으로서 나 자신과 벌거벗고 마주하는 것이 어쩌면 공부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연구하고 싶은 것, 내가 가르치고 싶은 것, 내가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 등 나는 ‘사장님’이 아닌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처음으로 갖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면 충만한 경험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랄까.

기독교라는 종교에, 부모님께, 남편에게, 직장과 관련된 사람들 등 어떠한 테두리 안에서 사고하다가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날마다 야근을 하느라 아이의 얼굴을 며칠씩 보지 못해도, 나의 결정권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보완하기 위해 함께 있는 날은 밤에 목이 아프도록 책을 읽어주고, 노래를 불러주었지만, 또 며칠씩은 만나지 못하고, 때로는 출장까지 다녀와도 ‘괜찮을거야’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고, 강의를 하고, 내가 스스로 스케줄을 관리할 수 있게 되며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선택하는 것은 오롯이 나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전업주부가 아닌 만큼 여전히 일과 육아 사이에 줄타기, ‘저글링’을 해야 하게 되면서(그래서 이 칼럼이 ‘저글링 육아’), 날마다 내가 결정해야 하는 사항들은 도리어 늘어난 것만 같다.

아이가 내가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 캠퍼스 안에 있는 유치원을 다니는 덕분에 아침마다 일찍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나도 연구소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하원하는 아이를 픽업하는 것은 나의 고모의 도움을 받고 나는 저녁에나 아이의 얼굴을 본다.

그래서일까. 어떤 날은 같은 반 친구가 “너 엄마 없지?”라고 묻기도 했단다. 하지만, 아이는 “아니. 나 엄마 있어. 엄마 학교에 있어서 유치원에 못 오는거야”라고 당당히 답했다는 말에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 켠이 아픈 건 사실이다.

감기에 걸린 나를 위해 아이가 챙겨준 비타민과 물

 

아이에게 쩔쩔매는 엄마는 아니라고 자부하지만, 내가 아이 입장이라면 우리 엄마도 늘 옆에 있고, 친구들과 놀 때 다른 엄마들처럼 함께 있기를 바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아이는 “엄마, 지금 할 일 있어? 나랑 놀 수 있어?”라고 먼저 물을 정도로 나이보다 부쩍 성숙해버린 것 같다.

감기에 걸려 누워있는 통에 아빠랑 둘이 유치원에 간 어느 날에는 평소 내가 먹는 비타민과 물을 챙겨 베개맡에 놓고 나가 나를 감동시켰다. 교회에서 등을 만들며 하나님을 가르쳐 준 사람으로 엄마 이름을 쓰면서 ‘사랑합니다’ 스티커를 붙여 와서 날마다 내가 겪는 갈등이 헛수고가 아니라고 위안을 하곤 한다.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처럼, 이제 나도 ‘누구의 딸도 아닌 재원’으로 살기 시작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이재원 문화평론가
한양대 실용음악과, 정보사회학과 겸임교수
전 텐아시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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