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경제학을 그리다

입력 2014-07-10 14:09 수정 2014-10-06 13:18
명화, 경제학을 그리다

 

* <그림 속 경제학>(문소영 지음, 이다미디어 펴냄, 2014)의 해설 겸 서평으로 '북모닝CEO'에 실은 원고입니다.

 

출장을 많이 다니던 1990년대 말 런던에서 아무 일 없이 금쪽같은 한나절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바로 영국국립미술관(The National Gallery)에 갔다. 영국국립미술관은 대영박물관처럼 관람객을 압도하

지는 않는다. 그림을 감상하는 데 가장 적합하게 조명이나 그림의 높이나 동선 등이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 함께 왔던 친구는 미술 교과서에서 본 그림들이 줄줄이 걸려 있어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했다.

 

나는 우리 교과서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 끌렸다. 관람객들이 별로 없었는데 터너의 작품들이 있는 곳에만 우연히도 펑크족 복장의 청년과 70대로 보이는 노부부와 내가 한두 발짝씩

떨어져 터너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조용히 그러나 충분히 감탄을 실어 속삭였다. “터너처럼 하늘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할아버지가 ‘맞아요”하며 맞장구를 쳤다. 힐끗 노부부에게 시선을 던졌던 펑크족 청년도 무언의 공감을 표시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노부부가 떠난 후에도 한참을 더 터너의 작품들 속의하늘을 보면서 서 있었다. 그때 내 눈길과 발길을 고정시켰던 터너의 대표작 두 점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바로 <전함 테메레르>와 <비, 증기, 속도>이다.


 

 

 

 

 

 

 

 

 

 

 

낭만주의 화가 터너가 ‘저녁놀의 장려한 빛과 대기의 떨림’을 아우르며 그린 하늘만을 나는 봤다.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트라팔가 해전의 주역이었던 전함 테메레르가 범선의 시대가 저물며 증기선에 예인되어 퇴역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석양이 불그레한 금빛으로 물들인 구름은 마치 죽은 노장을 위해 쏘아 올려진 예포의 포연처럼 대기 중으로’ 퍼지고, ‘증기선이 뿜어내는 불 같은 연기는 그 석양의 마지막빛과 대구를 이루며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는 그림에 표현된 시대적 의미까지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비, 증기, 속도>도 달리는 기차의 연기 사이로 보이는 비 뿌리는 하늘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서 ‘산업혁명’이라는 역동적인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알레고리를 이 책을 읽으면서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림 이전에 화가를, 화가 이전에 역사를 알라 문소영 작가에게 경제학을 가르친 스승으로 ‘추천의 글’을 쓴 이준구 교수가 고백한 것처럼, 영국국립미술관에 함께 갔던 나의 친구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고등학교 때 미술 책에서 본 그림들이 걸린 모습을 보고 환호하는 수준’으로, ‘그림에 녹아든 시대적 상황을 읽어’내지는 못한다. 이 책은 시대의 경제상을 담아낸 그림들을 통하여 시대의 성격과 그와 연관된 경제학의 개념들을 풀어내준다. 즉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상인들을 쫓아내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독점’과 ‘담합’을, 대부업자 부부의 그림에서 ‘이자’를, 엘리자베스 1세가 손을 얹은 지구본에서 ‘무역수지’를 설명하는 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중세-대항해시대-중상주의 시대-산업혁명-혁명의 시대-광고의 시대와 뉴딜’ 등 주로 연대기 순으로 다양한 배경의 그림 속 인물들 얘기와함께 전개하여 책을 통독하면 기원후 세계사의 핵심을 훑어 정리한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책에서 E. H. 카는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역사가를 연구하라고 했다. 그리고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 그 역사가의 시대와 사회적 환경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림도 비슷하다고 본다. 먼저 화가를 알아야 한다. 화가가 살았던 시대, 특정 작품을 그릴 때의 정황 등을 파악해야만 제대로 그림이 보인다. 모델이 된 인물부터 소재가 된 역사적 사실이나 신화, 구석의 소품까지도 화가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해서 의미가 살아난다. 화가를 이어서 그림을 파고들어 연구하는 접근경로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경제학이 바로 주된 경로가 된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대두라는 사회적 현상과 관련하여 인물초상화로 유명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얘기가 나온다. 앵그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마담 무아테시에>이다. 그런데 은행가인 무아테시에로부터 자기 부인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앵그르가 처음에는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회화에도 서열이 있었는데 역사화가 가장 높은 대접을 받았다. 앵그르가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았을 때는 초상화 주문에 적극 응했으나, 무아테시에가 요청했을 때는 이미 성공한 노년의 화가로 명성을 굳힌 이후라 거절한 것이다. 이후에 마담 무아테시에를 직접 보고는 그가 좋아하는 그리스·로마 조각 같은 고전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서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앵그르 개인의 경제 형편으로부터 시작해 바로 새로운 계급의 대두, 당시 미술계의 이면까지도 엿보고 나면 <마담 무아테시에>가 완전히 새롭게 보일 것이다.

 

그림으로 배우는 재미있는 경제학

20세기로 들어와서 광고와 ‘뉴딜 아트’라고 불린 정부 후원의 벽화들까지 다룬 것도 이 책의 미덕이라고 본다. 우선은 광고제작물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해준 것이 광고계에 종사했던 사람으로서 반갑고 고맙다. 광고하는 이들이 값이 비쌀수록 잘 팔리는 베블런 효과를 들어 명품 브랜드의 위력을 얘기하곤 한다. 이 책의 광고를 다룬 부분에 베블런재(Veblen Good)와 함께 정상재, 열등재, 기펜재 등 연관되어 알아야 할 개념들이 잘정리되어 있다. 역시 광고계에서 많이 쓰는 밴드왜건 효과나 스놉 효과에 대해서도 따로 풀이와 연관된 사례가 실려 있다. 자칫 시각적인 이미지에 의존하는 경향이 큰 광고인들,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는 현대인들에게 명확하게 정의된 개념들을 습득하여 본질을 파악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도 있다 하겠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벽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들이 몇 곳 있을 정도로 벽화가 낯설지 않다. 벽화가 미국에 성하게 된 까닭을 케인즈를 끄집어내며 설명했다. 당연히 프리드먼도 나오지 않을 수 없고, 복지와정부 지원금이라는 우리 현실의 문제로 바짝 다가왔다. 액자 속의 옛날 그림이 아닌 현실의 문제를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이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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