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어떤 관계인가요

입력 2016-06-18 14:52 수정 2016-06-20 09:40


이상한 일이다. 널찍한 공간이 확보돼 있는 길에서 마주 오는 사람과 살짝이라도 부딪힌다는 건. 둘 다 혼줄을 놓고 걷는 것은 아닐 터인데 말이다. 흔하지는 않지만 이럴 때마다 묘한 판타지적 상상에 빠진다. '서로를 끌어당기는 중력 작용일까? 유난히 텔레파시가 잘 통하는 사람일지도 몰라.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어제 아침 금계국이 무리지어 핀 당현천에서 또 비슷한 경험을 했다. 새삼 '관계'라는 단어에 집중한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득도한 후 처음 발설한 말이 연기(緣起)사상이다. "이 세상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따라서 어느 하나를 떼어내면 다른 한 쪽도 넘어지는 갈대 묶음처럼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 또한 없게 된다"는 것이다. 나와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인연이 있어 태어나고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는 뜻이다. 모든 '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연초에 타계한 신영복 선생은 '입장의 동일함'을 관계의 최고 형태라고 보았다. '머리에서 가슴, 손발로 향하는' 실천적 삶을 추구한 그는 타인과 자연에 대해 관찰보다는 애정이 필요하고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 연대보다는 같은 입장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비를 맞고 있다면 우산을 함께 쓸 것이 아니라 우산을 접고 아예 같이 비를 맞으라는 얘기인데, 처지가 다르면서 남을 돕거나 위로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란다.

관계에 관한 그의 인식은 서도(書道)에서도 잘 드러난다.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체를 직접 쓴 신영복의 서도 실력은 이미 한 경지를 풍미하고 있거니와 깊고 진한 성찰의 향기로도 오롯하다. 그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개칠(改漆)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자'(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독존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배 부르고 등 따숩다고, 가방 끈이 길다고,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처세에는 관계의 미성숙을 넘어 교만에 가까운 세계 인식이 반영돼 있다. 이웃의 결핍과 고통을 외면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불가해한 모순과 신비로 가득 차 있는 삶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럴 자격도 없다.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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