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도리와 우주선 안의 볼펜

입력 2012-01-23 07:28 수정 2012-01-23 07:28
며칠 전 지하철역에서 도로로 나오는 계단에 오르자마자 찬바람이 몰아쳤다. 다른 때보다 더욱 추운 듯해 이상하다 싶었더니 목도리를 코트주머니에 꾸겨 넣은 채로 나왔다. 목도리를 꺼내서 두르자 한결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목도리의 존재가 고마웠다. 겨울철엔 역시 목도리가 필수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목도리가 가져다 준 따뜻함에 완전히 경도되어서, 그 따뜻함을 느낄 수 있게까지 해 준 코트나 다른 옷의 존재는 거의 무시한 것 아닌가 싶었다.




만약 목도리에 대한 광고를 기획한다면, 목도리의 역할을 여러 가지로 규정하며 접근할 수 있겠다. 패션 품목이 될 수도 있고, 방한(防寒)의 종결자 노릇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에 경합을 붙는다면 방한이냐 패션이냐 하는 결론보다는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차이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코트나 모자 등 다른 품목과의 어울림을 생각하면서 패션 아이템으로 제안하는 측과 목도리 자체의 색상이나 감만 가지고 패션을 부르짖는 측과의 차이는 자명하지 않은가? 방한의 필수품목으로 목도리를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의복을 비롯한 물품들을 함께 고려하고 훑어본 후에 목도리의 장점이나 내세워야 할 점을 내놓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겠는가?




미국 우주항공국(NASA)이 예전에 진공상태의 우주선에서 볼펜의 잉크가 아래로 흐르지 않아서 그걸 해결하려 애를 쓰다가 잘 안되어, 당시의 라이벌인 소련은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했을까 보니까 소련의 우주인들은 연필을 쓰고 있었단 얘기는 아주 유명하다. 실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시사점이 있다. 볼펜을 써야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필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미국의 과학자들은 필기라는 근본 목적보다는 볼펜의 잉크가 흐르지 않아 써지지 않는다는 눈앞의 문제에만 매달렸다. 대체 왜 볼펜의 잉크 문제를 고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잘못된 마케팅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거기에 맞추어 광고를 기획하란 주문을 하는 광고주들이 있다. 분명히 매출 증대가 목적이고, 목표로 정해져 있는데 현실과 떨어져 폼만 나는 마케팅 계획을 들이미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시키는 것만, 시킨대로 하라고 한다. ‘제가 생각해 보니까 굳이 볼펜을 쓸 필요 없이 연필을 쓰면 되겠는데요’하면, ‘볼펜에 잉크가 흐르라 했잖아. 왜 시킨 것을 제대로 안 해’라고 우기며 소리 지르는 식이다. 이런 광고주가 제법 많다. 많은 광고회사들은 약자라, 곧 을(乙)이기 때문에 갑(甲)인 광고주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며 그대로 맞춰준다. 그렇게 맞춰주면서 광고회사가 스스로의 입지를 좁혀왔다고 본다.




성균관대학교 글로벌경영대학원의 학외 멘토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는 거기에 다니는 친구들, 곧 멘티들을 처음으로 만났다. 광고전략에 대한 설명은 들으려하지 않고, ‘그림이나 내놓아 봐’하는 광고주들이 많다는 신세한탄과 같은 얘기를 그 친구들한테 하며, 긴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It's a shame on both sides." 양쪽 다 창피한 모양새다. 광고주를 전략의 세계로 이끌지 못하는 설득력이 부족한 광고회사 사람이나, 기준도 없이 표피적인 느낌이나 감각으로만 결정하려는 광고주나 부끄럽다.




경합에서 광고주의 요구와 의도에 맞추려는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전략을 얘기하는 전개 방법에 따라 충분히 기분 거스르지 않고 설득하며 내 쪽으로 끌어들일 방법이 있다. 최소한 훨씬 많이 공부하고 생각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한 후배가 ‘90년대 중반에 당시의 한국과 미국 영화를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탈옥을 소재로 영화를 제작할 때 한국에서는 보통 어떤 방식과 과정을 거쳐서 빠져 나간다고 탈옥 시나리오를 만들고, 상황들을 그에 맞추어 꾸며서 넣어요. 미국에서는 혹시라도 탈옥을 가능케 할 허점이나 구멍이 있는지 먼저 공부하게 해서 그런 것들을 다 보완하고 틀어막죠. 그리고 난 후에 탈옥을 시키라고 다른 팀에게 숙제를 줍니다. 어떤 영화가 관객들을 더 많이 끌지는 뻔하지 않아요?”




과제를 ‘탈옥’으로 주면, 감옥에 대해서 연구하는 게 우선이다. 거기서 기발함과 재미가 나온다. 마케팅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과제에 맞추어 이런 식의 프로그램을 하면 성공한다고 하면서 성공하는 확신을 원하는 데이터들만 가져다 붙여서 주려 한다. 까딱하면 실패하게 만드는 여건들을 보여준 후 그것들을 깨부술 대책을 얘기해야 광고주의 기분이 약간 상할지는 몰라도 더욱 믿음직스럽지 않겠는가? 그런 데서 정말 반전(反轉)이 나오지 않겠는가?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

투표보험설계사·택배기사 등 노동3권 보장, 어떻게 생각하세요?

  • 특수형태 근로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교섭을 통해 권익을 보호받을 것 418명 37%
  • 4대 보험 적용 등 고용주의 부담이 늘어나면 일자리가 되레 줄 수도 우려 713명 63%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