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양지인 [宋襄之仁 ] 다르게 해석하기

입력 2011-05-12 04:19 수정 2011-05-12 04:19


위키백과에서 뽑은 송 양공(宋襄公)에 대한 설명이다.

 

(출생? - 사망 : 기원전 637년, 재위 기원전 651년 - 기원전 637년)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의 군주. 성은 자(子), 휘는 자부(茲父), 시호는 양공. 환공의 아들. 춘추 오패의 한 명으로 해당될 때도 있다.

기원전 651년에 송나라 공의 자리에 오른다. 양공은 목이(目夷)라고 하는 이복형이 있었고 양 공은 왕위를 목이에 양보하려고 했지만, 목이는 거절하고 송나라 공이 된 뒤에 목이를 재상에 임명하였다.

즉위 직 후, 제나라의 환공이 주최하는 회맹(會盟)에 참가하고, 그 후도 종종 회맹에 참가했다. 양공은 사사로운 일보다 예를 중시하는 이상주의자였다.

 

송양공은 그런 면모보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고사(故事)로 유명하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온 것을 그대로 옮긴다.

 

송(宋)나라의 양공(襄公)은 초(楚)나라와 싸울 때 먼저 강 저쪽에 진을 치고 있었고, 초나라 군사는 이를 공격하고자 강을 건너는 중이었다.  

이때 장군 공자목이(公子目夷)가 송양공에게 이르기를 "적이 강을 반쯤 건너왔을 때 공격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송양공은 "그건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야 참다운 패자가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면서 듣지 않았다. 

강을 건너온 초나라 군사가 진용을 가다듬고 있을 때, 또다시 "적이 미처 진용을 가다듬기 전에 치면 적을 지리멸렬(支離滅裂)시킬 수 있습니다" 하고 건의하였으나, 송양공은 "군자는 남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괴롭히지 않는 법이다" 하며 말을 듣지 않았다. 

그 결과 송나라는 크게 패하게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비웃어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고 하였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출처] 송양지인 [宋襄之仁 ] | 네이버 백과사전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어리석은 대의명분을 내세우거나 또는 불필요한 인정이나 동정을 베풀다가 오히려 심한 타격을 받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라고까지 친절하게 의미를 풀이하여 요약해 주었다. 그래서 송양공은 어리석음의 대명사로까지 불린다. 위키백과에서 뽑은 송양공 인물에 대한 설명을 봐도 ‘춘추 오패’에 확실하게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뚜렷한 본인만의 역사에 남는 업적,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긍정적인 ‘펀치라인(punch line)'이 없는 춘추시대의 평범한 군주 중 하나로 생각된다. 그것도 강대국은 아니고 송나라라는 작은 나라의 군주였을 뿐이다. ’송양지인‘의 고사를 낳은 초나라와의 홍수(泓水)전투로 그나마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위키백과에 나온 것처럼 춘추오패에 송양공이 속하는가 여부를 가지고도 말이 많다. 당연히 그 시대에 패자(覇者)로 인정한다는 공인인증서나 임명장을 준 것도 아니니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네이버 백과사전을 보면 춘추오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순자(荀子)》에 의하면 오패라 함은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 월(越)나라의 왕 구천(勾踐)을 가리키는데, 한편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이나 오나라 왕 부차(夫差)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출처] 춘추오패 [春秋五覇 ] | 네이버 백과사전

 

패자로서 이름이 거론되는 사람 중에 송양공과 같이 작은 나라 출신은 없다. 모두 뭔가 번듯하게 토지의 광대함이나, 군사의 용맹스러움이나, 오랜 역사, 발전된 경제 등 내놓을 것이 확실한 국가들이었다. 그런데 송나라는 그런 것이 없었다. 요즘으로 치면 이태리가 돌려가면서 맡는 의장국이나 회의 주최하는 것을 넘어서 실질적으로 G7의 모든 국가들을 주도하는 식의 형국을 만들어낸 셈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위키백과에서 송양공은 ‘사사로운 일보다 예를 중시하는 이상주의자’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는 말로만 예를 외치며, 이상을 부르짖는 사람이 아니었다. ‘송양지인’으로 어리석음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는 홍수전투에서의 송양공의 행동을 송양공에게 긍정적으로 다른 방향에서 해석하면, 그는 절대절명의 전쟁터에서도 눈앞의 승리 기회에 연연하지 않고 예를 지킨 사람이었다.  

<제나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장웨이 지음,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펴냄, 2011)에서는 홍수전투에서 송양공의 행위를 이렇게 예찬한다. ‘생사존망의 긴급한 시점에서 의리를 지키고 전쟁의 규범을 따를 수 있었다는 것은. 인성 가운데 가장 고귀한 측면을 구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강한 항심(恒心)’이 있어 가능하고, ‘결과만 따지고 수단은 따지 않는’ 보통의 인간들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예에 대한 항심이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라는 약소국의 송양공이 바로 훨씬 강대한 국가의 군주들을 제치고 패자의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나는 본다. ‘예(禮)’는 당시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분이다. 군주 중에서 그 ‘예’의 최고봉이 나섰으면 함부로 어느 누구도 군사력과 경제력과 같은 물질적인 것만 믿고 내칠 수가 없다.  

송양공에게는 ‘예’가 바로 그의 브랜드였던 것이다. 그 브랜드로 그는 송나라의 당시 형편을 생각했을 때 감히 바랄 수도 없는 패자의 자리에 올랐다. 자세히 연구하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으로 송나라와 초나라의 군사력 등 여러 형편을 고려했을 때 홍수전투에서 아무리 준비가 되지 않은 초나라 군사를 송나라 군대로 친다고 하더라도 결국 최후의 승리는 초나라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초반전에서의 약간의 승리를 위하여 자신이 평생을 두고 쌓아온 ‘예(禮)의 송양공’이라는 브랜드를 망가뜨리는 것은 악수 중의 악수요, 근시안적이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에서도 얘기한 누구에게나 보이는 보기 싫은 수 하나를 차마 두지 못하여 패배를 감수하고 만다는 김인 9단이 생각났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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