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무덤은 아이들의 놀이터

입력 2011-05-03 22:46 수정 2011-05-03 22:46


대학교 2학년 때 낯익은 고고미술사학과 친구들이 갑자기 TV 뉴스에 나왔다. 이례적으로 학생운동과는 전혀 상관없이 학과 수업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그 친구들이 봉천동 달동네로 고고학 발굴 실습을 나간 것을 기자가 쫓아가 카메라에 담아 보도를 했다. 땅도 파보고, 쓰레기장도 뒤진 후, 자신들을 먼 훗날의 고고학자로 가정하여 1980년대 초의 한국인들의 삶을 재구성해보는 고고학의 전형적인 실습 과정의 하나였다. 이들이 내린 결론 중의 하나가 ‘1980년대 한국인들의 주식은 라면이었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결론은 나중에 알고 보니, 고고미술사학과에서 쓰레기장으로 실습을 나갈 때마다 항상 내리는 결론이었다. 어쨌든 쓰레기장은 고고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조개무덤이라고 하는 패총(貝塚)도 원시시대의 쓰레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저명한 작가이자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인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의 『문화편력기』(조영렬 옮김, 마음산책 간, 2008)을 보면 패총을 뒤지는 고고학자의 얘기가 나온다. 여네하라 마리와 선을 본 남자인데, 고고학 발굴에 관하여 재밌는 얘기를 한다.  

패총을 발굴하면 가끔 이해하기 힘든 물건들이 나온다고 한다. 작은 돌이 꽉 차 있거나 나뭇가지 몇 개가 들어가 있는 토기나 패총 쓰레기장의 귀퉁이에 삼각뿔 형태로 쌓아올린 조개껍질 등이 학자들에게 논란거리가 된단다. 보통 거기에 주술이나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며 추리를 한다. 그런데 이 남자는 색다른 실험을 통하여 다른 추론을 했다. 그의 누나가 하는 유치원 마당에 쓰레기를 모아서 쓰레기산을 만들었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부모가 사주거나 유치원에 있는 장난감들을 팽개치고 쓰레기산에서 놀기 시작했다. 몇몇 부모들이 유치원에 더러운 쓰레기를 갖다 놓았다고 항의하며 쓰레기를 치우려하자 아이들이 강력하게 저항하여 할 수 없이 그냥 놔두었을 정도로 아이들은 쓰레기산에 흠뻑 빠져 놀았다. 그 장면을 요네하라 마리와 선을 본 고고학자는 면밀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들이 페트병에 나뭇가지나 돌과 흙을 집어넣고 노는 모습이나, 쓰레기산 가장자리에 규칙적으로 빈 깡통들을 쭉 둘러놓는 모습 등을 촬영했다. 그는 유치원의 쓰레기산에서 노는 아이들의 관찰기록을 바탕으로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물건들이 아이들이 그냥 논 결과물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요네하라 마리는 자신이 싫어하는 외모와 버릇을 두루 갖춘 그 고고학자를 자신이 아니면 누가 돌보아 줄 수 있을까 싶어서 계속 만났다고 한다. 아무래도 실상은 글에서도 슬쩍 비추기도 하지만 고고학 학문적인 접근으로부터 모든 것에서 문자 그대로 ‘틀을 깨는’ 모습에 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유치원에 쓰레기산을 만들어 관찰한 위의 얘기를 읽으면서 나도 무릎을 치다시피 했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 그 고고학자가 보여준 것과 같은 방식이 주는 시사점이 매우 많았다. 

그는 우선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의문을 제기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이 특별한 의미를 갖거나 의도 하에 행해지지는 않는다. 토템신앙이 생활 전반에 영향을 강하게 미쳤다는 태곳적의 원시인이라도 짬짬이는, 어느 곳에서는 무의미한 행동도 할 수 있다. 그는 해답의 실마리를 교과서가 아닌 인간 자체에서 찾았다. 쓰레기 더미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을 그는 상상했던 것이다. 그 인간들에 자신의 경험을 보태며 아이들을 발견하고, 관찰조사기법을 동원하여 훌륭한 논거를 만들었다.  

봉천동 달동네에서의 실습을 통하여 나의 고고미술사학과 친구들이 배운 것은 크게 두 가지가 아닐까 한다. 첫째, 실용적으로 발굴을 하는 방법론의 기초, 둘째로 섣불리 해석하고 추론하는 위험성. 방법을 배움으로써 유물들을 제대로 발굴하고 수습하며, 그 유물들을 만든 사람들이나 둘러싼 환경 등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재구성하여 내는 사고(思考)를 배우는 것이다.  

마케팅으로 치면 조사를 통한 숫자와 같은 데이터와 그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그 숫자와 공식을 넘어서 인간의 모습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그저 이론적으로 배운 것에만 얽매이면 그저 바쁜 가운데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된다. 아무런 이론적 바탕 없이 상상력의 나래만 펴서는 어쩌다가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다. 논어의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이 바로 그런 경우에 대한 경구가 아닌가 한다.  

※ 고고미술사학과 친구들의 쓰레기장 발굴 실습과 관련한 얘기가 혹시 더 없을까 싶어서 인터넷을 서핑했다.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지건길 선생님(고고인류학과 61학번)의 회고록에 실렸다며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찾았다. 

3학년 때인 1964년 가을 김원룡이 이끄는 조사단에 포함돼 풍납토성 발굴에 참여한 지건길은 4학년 때인 이듬해 6월 초 소사(지금의 부천) 신앙촌 내 오물처리장 발굴에도 참여했다. 신앙촌이 건설된 1957년 이래 당시까지 그곳 쓰레기장 퇴적 양상을 고고학적인 방법을 통해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가 쓴 세계 고고학사에도 이름을 올린 한국의 '쓰레기장 발굴'이었다. 쓰레기장 발굴은 후에 세계 고고학계에서도 새로운 방법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쓰레기 발굴을 통해 드러난 1950-60년대 대한민국 국민의 주식은 라면이었다. 이 발굴은 '고고학의 조사 성과가 반드시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는, 지금으로서는 상식화됐지만 당시로서는 나름 획기적인 사실을 일깨웠다. 

국산라면은 1963년 9월에 처음 세상에 나왔다. ‘1950-60년대의 주식’이 말이 되지 않는다.그 때 가격이 10원으로 버스비와 같아서 지금보다 훨씬 비싼 음식으로 간주되었다. 신제품으로 익숙하지도 않았고, 유통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소수의 사람들이 아끼며 즐기고 대접하는 음식이었다. 1968년 울진삼척공비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맹추위 속에서 라면이 최고의 식사대용으로 역할을 하면서,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지건길 선생님의 회고록을 보지는 못했지만, 고고학자 분꼐서 이런 엉터리 내용을 집어 넣으신 부분은 참으로 안타깝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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