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대화하는 부모와 자녀가 늘고 있다

입력 2011-05-01 21:47 수정 2011-05-01 21:47


애들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부모를 가끔 동네에서 볼 수 있다. 우리처럼 외국에 주재를 나갔다 들어온 직후인가보다 생각했었다. 사실 우리는 애들이랑 영어로 대화를 한 경우는 미국에 있을 때도 그랬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더더욱 거의 없었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이라 바로 유치원을 가야했던 큰 애의 적응에 혹시나 도움이 될까 큰 애에게만 초기 얼마동안 영어를 썼었다. 그것도 채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애가 어느 정도 영어와 유치원 분위기에 익숙해진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그리고 집에서는 한국어로 얘기할 것을 강력하게 시행했다. 작은 놈은 한국어를 하기 싫어서 집에서는 입을 닫아 버리는 문자 그대로 무언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아무리 한국어를 한다고 하더라도 애들끼리 영어로 말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잔인한 것 같았다.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직후에 짧은 기간 동안에 두 애들은 서로 영어로 대화를 했다. 길거리에서 지네끼리 그렇게 영어로 대화를 하는 걸 보고,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애들이 둘째 애를 가리키며 ‘애기가 영어로 막 뭐라고 그래’ 하면서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지나간 적도 있다. 우리가 2월에 귀국했는데, 바로 3월부터 애들 둘 다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며 바로 그들의 공용어도 한국어가 되었다. 영어를 습득하는 것보다 두 배의 속도로 빨리 빠져 나간다. 미국에 유학하던 친구가 “잊혀져가는 한국어, 잡히지 않는 영어”란 탄식을 한 적이 있는데, 30대의 유학생의 한탄과 애들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애들에게는 잡히고 잊혀지는 두 가지 과정이 모두 어른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급속하게 진행이 된다. 

집 근처에서 애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대부분의 경우 정확하게는 대화하려고 애를 쓰는 부모자녀에게서 몇 가지 공통적인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영어 쓰는 자녀들의 대부분이 초등학교 입학 전의 연령대다. 둘째, 부모들의 영어가 그리 능숙한 편이 드물다. 셋째, 위의 두 가지가 주된 이유하고 생각하는데, 대화의 수준과 양이 제한적이다.  

첫째의 애들이 어린 것에서 유추해보면 아마도 영어유치원을 다니는 것 같았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할 나이이고, 유치원을 벗어나면 부모와 함께 다녀야 하며, 작은 칭찬에도 잘 넘어가는 시기인지라 영어유치원에서 배운 것들을 한마디씩 하면서 부모를 기쁘게 해주는 것 같다. 그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고 쓰고, 무엇보다 부모 이외에 친구들이란 또래집단을 이루면서 부모와의 영어시대는 바로 끝난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지속되지 않고는 효과를 낼 수가 없다. 

일본문학 전문 번역가인 권남희 씨는 일본에서 사업하는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거기서 딸을 낳았다. 그 딸에게 아빠는 일본어로, 엄마는 한국어로 얘기를 했다고 한다. 딸은 자연스럽게 아빠에게는 일본어로, 엄마에게는 한국어로 응석을 부리고 얘기를 했다. 그런데 다섯 살에 유치원을 다니며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아빠에게 한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단다. 아빠가 한국어를 못한다고 하자, 그 딸은 ‘남자도 한국어 하는 것 알아요’라고 얘기하며 그로부터 한국어를 고집했단다. 그 딸은 남자들은 일본어를, 여자들은 한국어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비슷한 경우를 유럽의 4개국 접경지대의 알프스산맥 지역 마을에서 태어나서 후에 유명한 언어학자가 된 인물의 어린 시절 회고담에서 들은 적이 있다. 부모는 물론이고, 하녀, 유모, 집사 등이 모두 다른 말을 사용했는데 그는 사람이 다르니까 다른 언어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컸단다. 권남희 씨는 그 딸이 그렇게 애써 익혀온 일본어를 잊는데 채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다섯 살 나이였으니 그 정도도 오래 간 것이다. 후배 하나는 ‘70년대 말 초등학교 5학년 때 영국에서 살다가 돌아왔는데, 어찌나 철저히 영어를 잊었는지 중학교 입학하여 다른 애들과 별 다를 바 없이 알파벳 쓰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 연년생 형은 6학년으로 귀국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교에 입학하여 영어 잘하는 아이로 불려 다니며 나중에는 공중파TV의 영어회화 프로그램에까지 고정출연했다.  

자주 듣는 말로 ‘영어에 한(恨)이 맺힌’ 한국인들이 많다. 꼭 영어가 아니더라도, 언어가 아니더라도 어느 한 가지 특정한 과목을 가지고 입시, 입사, 진급, 월급에 덧붙여 사람의 됨됨이까지 판단한다면 어떤 것에도 한 맺힌 사람들이 수도 없이 나올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부모가 노력을 해도 한이 맺힌 부모의 비율만큼, 아니 이제는 영어에 대한 비중이 더 높아져서 그보다 더 큰 비율의 애들이 더 큰 한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그 한은 사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정도를 떠나서 모국어로 영어를 쓰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나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하고, 별 불편이 없이 쓴다고 해도 모국어로서 영어를 쓰는 무리와 꼭 비교를 하는 한국인들이 있으니 보통 무시를 하지만 어떤 때는 야속한 느낌이 들며 다른 종류의 ‘한’으로 맺히기도 한다. 그런데 모국어로,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영어를 쓰지 않을 때는 영어를 사용하는 데는 당연히 한계가 있다. 그 한계가 부모와 자식이 그것도 어린 시절에 어색하게 주고받는 영어로는 절대 아주 조금도 극복될 수 없다.  

영어로 서로 대화하는 어린 자녀와 부모들에서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하는 부모를 만나기 힘든 것은 당연한 소치이다. 한국인인데 어찌 영어를 그리 잘할 수 있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겠나? 대화의 상대자가 유치원생 어린 아이이니 유창하게 할 수 있는 말들도 사실 별로 없다. 그러니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 부모를 보기 힘든 것도 실제 부모의 영어 실력을 떠나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도 하겠다. 애들과의 대화수준도 그에 따라서 마찬가지이고.  

주말에 영풍문고 서가에서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 2023년, 영어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서정곤 외 4인 지음, 한겨레출판, 2003) 책을 집어 들고 잠깐 훑어보다가 샀다. 오래 전부터 영어 교육과 우리 사회에서의 영어의 지나친 무게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이 책은 2023년 영어가 공용화되는 것을 가정하여 시행될 때, 공용화 이후 30년, 60년, 100년이 지난 후에 우리 사회와 한국어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가상역사의 형식으로 탐색하고 있다.  

집에 와서 본격적으로 읽기 전까지 이 책이 거의 10년 전인 2003년에 나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목차와 주요 내용을 보았는데 요즘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이 그대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다보니까 위에서 쓴 것과 같이 부모와 자녀의 공공장소에서의 혹은 일상에서의 영어대화와 같은 현상은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권 차원에서의 일방적인 영어 교육과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가 이렇게 심하고 노골적으로 표출된 적은 없었다. 실제 영어공용화가 된 이후의 저자들이 그리는 우리 사회 모습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아마도 한글이 사라지고, 우리 사회가 미국 주변부로 변화하는 속도는 저자들의 예상보다 더욱 빠를 것이다.  

둘째 애와 함께 부모님 댁을 다녀오면서 부모와 자녀가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자주 본다고 말하자 바로 대답했다. “저도 형이랑 그랬다면서요? 근데 저희는 영어밖에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랬죠. 영어하는 데 그렇게 엄마랑 영어로 하는 것 아무 소용없는데....” 영어와 관련해 우리 애는 영어 잘 못한다. 그냥 나중에 외국 애들 만났을 때, 말을 잘 못해도 주눅 들지 않으면 미국 생활은 플러스였던 것으로 치기로 했다. 현재까지는 영어에 대해서 점수를 떠나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 그 정도면 되었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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