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술집에서의 삼성전자 20주년

입력 2009-11-02 04:40 수정 2009-11-02 04:40


1989년 10월말 평일 점심시간 직후에 을지로 롯데호텔 지하의 ‘바비런던(Bobby London)'이라는 당시로서는 꽤 고급 맥주집에서 맥주를 한 잔 앞에 놓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로 코앞에 닥친 11월 1일의 삼성전자 20주년 창립기념일에 당시 삼성전자 대표이사였던 강진구 부회장이 읽을 창립기념사를 쓰고 있었다. 그 해 7월말에 부서 배치를 받았고, 업무나 회사 분위기에 익숙해질 사이도 없이 9월중순부터는 한 달 이상을 출장으로 보냈고, 그 출장 프로젝트의 후속 업무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으며, 그야말로 '면(免) 수습’ 통지를 받은 신입사원에게는 저 멀리의 회장님 빼고는 최고 높으신 부회장께서 그 중차대하게 들리는 20주년 기념식 단상에서 읽으실 원고를 써야한다는 게 상당히 부담스런 과업이었다.  

원고를 챙기는 사람들은 하나씩 늘어나는데 진도는 나가지 않고, 다른 일들에 전같이 신경을 쓰지 않다보니 다른 일들에 연계되어 괴롭히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래서 마감일을 코 앞에 두고 나름대로는 특단의 조치로 회사 밖에서 원고를 쓸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혼자 글을 쓰면서 방을 따로 잡아 여관작업을 하기는 부담이 되었다. 사설 도서실은 답답할 것 같았고, 고등학교 때 가끔 다니던 사직도서관이나 정독도서관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막 직장인이 되었는데 다시 유신과 5공시절의 학생 때를 연상시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아 바로 기각시켰다.  

그렇게 원고를 시작하지 못하며 엉뚱하게 원고 쓸 장소를 두고 고민하는 것을 본 몇몇 사람들이 술집으로 가라고 추천을 했다. 원고를 쓰는 것이 제법 시간이 걸릴 터이니 몇 시간을 뭉개고 앉아 있을 만하며, 조용한 곳을 택해야 했다. 그렇다면 제법 고급 술집이어야 하는데, 사람에게 눈치를 주거나 치근거리지 않고 분위기도 조용한 곳을 찾다가 바비런던이 최적의 장소로 떠올랐다. 롯데호텔 안에 있고 제법 값이 비싸서 손님들, 특히 뜨내기로 시끄럽게 하는 손님들이 많지 않고, 점심시간 직후부터 저녁까지는 손님들이 없다는 게 무엇보다 큰 강점이었다. 회사에서도 별로 멀지 않으니, 혹시나 자료가 더 필요하거나 진도를 점검하기 위해 들를 때도 좋다는 이유가 덧붙여졌다. 물을 탄 맥주들이 판을 치던 시절이었는데, 값이 비싼 만큼 맥주의 품질이 좋다는 점은 보너스였다. 

노트북 컴퓨터는 고사하고, 컴퓨터조차도 몇 명이 공용으로 쓰던 시절이었던지라 연습장 역할을 하는 종이 노트북과 원고지, 경영기획실에서 받은 참고자료들을 가방에 쌌다. 삼성전자 본사가 중앙일보 빌딩에 있었다. 회사 바로 앞에서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혼자 대한항공 건너편 지하철 통로로 들어가 유원빌딩과 시청 앞 광장 밑의 지하철 통로를 지나서 바로 롯데호텔 지하로 가서 목적지인 바비런던으로 갔다.  

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예상 외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났다. 계모임을 하는 듯한 아주머니 한 무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가벼운 뷔페를 제공하는 런치스페셜이 있다고 한다. 잠시 다른 곳으로 갈까 했지만, 장소를 옮긴다고 회사에 다시 연락하기도 번거로워 그 아주머니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아주머니들은 일찍 나가고,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생각보다 빠르게 원고지를 메꾸어 나가고 있었다. 원고지 채워지는 속도와 비슷하게 맥주잔을 비우는 템포도 빨라졌다. 6시 좀 못 미쳐서 거의 마무리 단계라 인사말을 쓰려던 찰나에 선배 과장부터 선배들이 밀어 닥쳤다. 후다닥 인사말을 되는대로 끝내버리고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졌다. 원고 쓴 종이를 잃어버리지 않고 다음 날 출근한 것이 용할 정도였다.  

창립 20주년이라면 상당히 큰 행사였는데, 그 기념사에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창립기념사가 그랬듯이 밝은 미래를 향한 기대와 그를 위한 임직원들의 분발 등을 촉구하며 함께 희망을 갖고 노력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코자 애를 썼을 것이다. 그 해의 삼성전자는 그런 희망을 품을 만한 전기(轉機)적인 일들이 있었다.  

가장 크게 와 닿았던 일로는 국내 가전시장에서 마침내 골드스타의 금성사를 누르고 매출 1조원을 달성하면서 1위에 등극한 것이다. 물론 금성사에서는 삼성의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강력하게 반발했고, 극심했던 노사분규로 생산에 차질을 빚은 것이라고 얘기했으나 어쨌든 국내시장에서의 흐름의 주도권을 삼성전자가 잡게 되었던 전환점이 바로 1989년이었다. 그룹 전체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반도체가 1988년 흑자로 전환하여, 그 해부터 그룹의 수익 부문에서 간판스타로서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전해에 가전, 반도체, 정보통신, 컴퓨터의 4개 부분을 통합한 효과가 나는 것이라고 들떠서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전해인 1988년 11월 1일에 부문을 통합하여 새로이 출범하면서 창립기념일을 그 날로 바꾸고 처음 맞는 창립기념일이기도 했다.  

그 해 말에 외신에서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한국’이라는 헤드라인을 단 기사가 실렸다. 회사 안에서 공식적으로 열린 송년회 자리에서 한 고위 간부가 샴페인은 터뜨리지 맙시다며 큰 소리로 너무 뻔한 농담을 한 기억이 있다. 그 때 사실 잘 나간다고 하는 삼성전자의 잘못을 꼬집는 내용의 사내방송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1990년 1월에 틀 예정으로 사내방송으로는 최초로 해외촬영까지 하는 등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1993년에 제일기획에 입사하여 신경영 교육 프로그램을 보고, 창립 20주년에 만들었던 프로그램과 너무 흡사하여 깜짝 놀라기도 하고, 시대를 앞서 갔던 느낌도 들어 괜히 혼자 뿌듯했었다.  

어쨌든 20주년 기념사는 삼성전자 사사(社史)나 사보의 어느 한 구석에 남아 있겠지만, 내게도 별 기억이 없고 어느 누구 나중에 특별하게 그 내용을 얘기한 적이 없다. 바비런던에 가서 글을 쓰겠다는 철없는 신입사원과, 나중에 거기 전 팀이 합류해서 벌였던 술자리 얘기는 많이 했다. 내게는 삼성전자의 창립 20주년과 연관해서는, 사보의 특집기사에 헤드라인 비슷하게 안내문 형식으로 썼던 글이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이 어우러져 기억에 남아 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장미꽃을 키워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장미꽃 스무 송이를 얻기 위하여 얼마만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를. 지금 우리 가슴에 안긴 장미꽃 스무 송이 뒤에는 우리 선배들의 땀과 눈물이 담겨져 있다. 이제 그들이 개간해 놓은 이 바탕 위에 광활한 장미꽃밭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 

장미꽃을 실제 키워본 적도 없고, 갓 들어온 신입사원에 어울리는 글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쨌든 곡절은 있었지만, 나중에 삼성전자의 장미꽃밭이 일구어졌고 거기에 한 송이 정도는 심는 것을 옆에서 도운 것도 같아 역시 뿌듯하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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