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주 CEO와 결혼한 여성 광고인

입력 2009-01-21 16:24 수정 2009-01-21 16:24
 

광고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에서 광고인으로




        나는 그저 돈 몇 푼 벌려고, 내 다리를 좀 더 미끈하게 보일 수 있는 드레스와 삭스(Saks)에서 애한테 입힐 옷가지나 장만하고 나한테는 과분할 지도 모르는 아파트에서 살아볼까 하는 목적으로 맥캔 에릭슨(McCann Erickson)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 와중 빌 번박(Bill Bernbach)을 만났고, 나는 진지한 여성 광고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1950년대의 뉴욕에서 ‘빌’은 바로 빌 번박을 일컫는 것이었다.

- 메어리 웰스 로렌스(Mary Wells Lawrence)의 자서전 첫 머리에서 -




        2008년 8월초 뉴욕 다운타운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중고책방이라는 스트랜드(Strand) 서점 지하의 경제서적 코너를 훑고 있었다. 뉴욕에 들르면 일반 대형 서점에 먼저 들러서 어떤 신간서적들이 나왔는지 둘러보고, 몇 권 살 책들의 리스트를 작성한다. 그리고 그 리스트를 가지고 스트랜드 지하의 신문이나 잡지에 서평(書評)이 실린 책들만을 모아 놓은 구역으로 간다. 그 구역만 해도 웬만한 서점만큼 책이 있는데, 저자 이름을 가지고 책들을 찾으면 반값으로 신간서적을 구입할 수 있다.



        전에 뉴욕에 왔을 때, 대형서점에서 작성한 리스트에 올렸던 거의 대부분의 책들을 그렇게 샀었다. 그런데 8월에는 이상하게도 출간된 지 몇 개월이 지난 책들이 몇 권 끼어서 그랬는지, 혹은 서평들이 실릴 만큼 주목을 받지 못한 책들을 내가 골라서인지 원래 리스트의 책들 중 반 수 정도만 서평코너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저조한 수확에 아쉬움을 달래려 경제서적 코너의 서가에 들러 쓸만한 책들이 있나 찾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하드커버가 주종을 이루는 그 서가들에서 오히려 페이퍼백의 작은 크기로 우연히도 눈에 띄어 메어리 웰스 로렌스의 자서전인 <A BIG LIFE (in advertising)>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건성으로 넘긴 첫 페이지의 첫 문장을 읽으면서부터 이 책에 빠져 들어버렸다. 바로 위에 실린 빌 번박을 만나기까지 자신을 묘사한 문장들이다.




        메어리는 광고인이 아니라 직장인으로서 맥캔 에릭슨이라는 잘 나가는 광고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으로 치면 명품 옷과 더 큰 아파트의 꿈을 꾸면서 살고 있었다. 빌 번박이 그레이(Grey)로부터 독립하여 DDB(Doyle Dane Bernbach)를 세우면서 자신의 철학에 입각한 일련의 광고로 선풍을 불러일으키기까지는 그랬다. 직장인 메어리가 잊고 있었던 광고인으로서의 열정을 빌 번박이 불러낸 것이다.


        메어리 자신의 기술을 곱씹어 보면, 맥캔 에릭슨이란 큰 회사에서, 그리고 전형성이 지배하던 당시 광고계의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아주 강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갔던 포트폴리오-바로 큰 회사의 상사들 눈에 맞추고, 전형성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던-에 보이는 것보다 자신이 훨씬 재능이 있고, 색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임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비행기를 타, 이륙준비하면서 기내가 어수선한 시간 동안에만 잠을 재촉하는 목적으로 이 책을 펼쳤는데, 서점에서 첫 문장을 봤을 때의 충격이 계속 증폭되었다. 나 자신은 과연 직장인이 먼저인지, 광고인이 먼저인지부터 시작하여, 전형성의 틀에 갇힌 것은 아닌지, 그 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는지, 나의 포트폴리오는 무엇이고 그것들이 오히려 나를 압도하고 나는 거기에 편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음표와 한숨이 교차하며 서로 꼬리를 물었다.




여성 광고인으로 독립하기



        빌 번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메어리가 책에서 지적했듯이 ‘약점 속에서 장점을 찾아내어 방향을 살짝 틀어’ 보여 주는 데 달인이었다. 거론하기조차 진부하게 느껴지는 폭스바겐(Volkswagen)과 애비스(Avis)의 전설적인 캠페인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런데 메어리는 조금 다른 접근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은 꿈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광고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했다. 여기에서의 꿈은 상상 및 동일시와 통한다. 고객들에게 상상할 거리를 던져 주고, 고객들이 실제로 느끼고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광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메어리는 매리온 하퍼(Marion Harper)라는 현재의 IPG(Inter Public Group)로 발전하게 되는 광고회사들 간의 느슨한 연합체를 꿈꾸던 인물의 눈에 띄게 된다. 매리온 하퍼는 WPP를 만든 마틴 소렐(Martin Sorrel)의 ‘50년대 판 선구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50년대 후반에 이미 IPG, 옴니콤(Omnicom)과 같은 형태의 커뮤니케이션 그룹의 아이디어가 나왔고, 실체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또한 놀라웠다.


        메어리는 IPG 산하의 특수프로젝트 전담이라고 할 수 있는 ’잭 팅커 & 파트너스(Jack Tinker & Partners)'라는 회사로 스카우트된다. ‘특수’라는 접두어가 붙은 많은 조직과 회사들이 그렇듯이 실속은 별로 없이 의미와 이름만 거창했던 조직이었다. 운영에 관한 전권과 함께 어느 정도 실적을 올린 후 사장(President)으로 임명한다는 조건으로 메어리는 그 조직에 합류한다. 메어리가 엄청난 추진력을 발휘하여 팀을 구성하면서 ‘잭 팅커 & 파트너스’는 비로소 제대로 된 광고회사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최초의 히트작으로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알카셀처(Alka-Seltzer)의 “어떤 형태의 위장에도 통하는(No matter what shape your stomach's in)" 캠페인이 나왔다. 이어서 떠오르는 항공사였던 브래니프(Braniff International Airways)를 영입하면서, 세계 항공업계의 모습을 뒤바꾸어 놓는다.

 
       “The end of the plain plane"이란, 굳이 번역을 하자면 ”그저 그런 항공사는 가라” 혹은 좀 젊잖게 하면 “평범한 항공사의 종언”이란 슬로건과 함께 “색상 프로그램(Color program)"이라고 명명한 광고를 넘어선 대대적인 전방위 마케팅을 펼쳤다. 일곱 가지 화려한 색상으로 비행기 각각을 칠하고, 세계적인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패션 디자이너를 기용하여 비행기 실내와 클럽 라운지를 고급 레스토랑처럼 꾸몄고, 군대 유니폼 같던 승무원들의 복장을 평상시에도 입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탈바꿈을 시켰다. 브래니프의 승무원 특히 여승무원의 유니폼은 ‘60년대의 패션 아이콘의 하나로까지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안정된 기반을 마련한 메어리는 자리를 옮길 때 약속했던 사장으로의 임명을 기대했으나, 매리온 하퍼의 반응은 달랐다. 연봉과 권한은 사장과 같이 해주겠으나 공식적인 임명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아직 여자 사장을 받아들이지 못해(The world is not ready for women president)." 사장이, 최고 책임자가 여자라는 것을 공식화하면 더 큰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하퍼가 내건 이유였다. 그리고 그는 연봉 1백만$를 제시했다. 이 때가 1966년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채 2만$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선수 중에는 ‘79년 놀란 라이언이 최초로 연봉 1백만$을 돌파한다. 그래서 메어리는 창업의 길을 택해 ’웰스 리치 그린(Wells Rich Greene, Inc.)'를 만든다.




로맨스와 여성성




        ‘웰스 리치 그린’이 출범하여 기틀을 잡는데 든든한 역할을 해준 것은 역시 브래니프항공사였다. 그리고 광고인 메어리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바로 가장 큰 광고주인 브래니프 항공사의 CEO인 하딩 로렌스(Harding Lawrence)와 결혼을 하는 것이다.


        브래니프 항공사 본사가 위치한 댈라스(Dallas)에서 프리젠테이션을 마친 광고대행사의 여성 CEO를 광고주 CEO가 직접 자기 차에 태우고 공항까지 데려다 주며 배웅을 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급하게 수속을 마치고 뉴욕행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는 게이트로 들어가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는 데 바로 광고주 남성이 서 있다. 차 열쇠를 양손으로 주고받으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날 그녀는 비행기를 타지 않았고, 얼마 안 있어 둘은 결혼을 발표했다.


        물론 댈라스 공항에서의 그 결정적인 순간에 바로 사랑이 잉태된 것은 아니었다. 배우와 같은 준수한 용모의 두 중년 언저리의 이혼녀, 이혼남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비즈니스 파트너 이상의 호감을 가졌다. 특히 광고주의 관심사와 취미까지 함께 한다는 메어리의 광고주에 대한 헌신이 큰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둘이 결혼한 이후에는 메어리의 자서전이라 그녀의 시각에서 기술하여 그렇기도 하겠지만 남편인 광고주의 외조가 빛난다. 경제계에서의 자신의 위상과 항공사 대표로서의 폭넓은 지인관계 등을 활용하여 새로운 광고주를 영입하고, 기존 광고주와의 관계를 강화시키는 소위 ‘호스피탤러티(Hospitality)'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브래니프항공사보다 훨씬 큰 TWA항공사가 ’웰스 리치 그린‘과 광고대행계약을 맺으려 하는데, 브래니프항공사가 걸림돌이 되자 주저 없이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대행사를 찾는 번거로움을 감수했다. ’웰스 리치 그린‘은 이후 번창일로, 뉴욕증시에 상장까지 되었고, 메어리 웰스 로렌스는 ’광고인 명예의 전당(Advertising Hall of Fame)'과 ‘카피라이터 명예의 전당(Copywriter Hall of Fame)' 두 곳에 모두 헌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브래니프항공사는 ’웰스 리치 그린‘과의 결별 이후 더 이상 ’색상 프로그램‘과 같은 인상적인 광고를 내놓지도 못했고, ’80년대 초에 결국 파산하고 만다.


        메어리 이후에 ‘오길비 앤 매더(Ogilvy & Mather)'의 쉘리 라자러스(Shelly Lazarus), 맥캔 에릭슨의 니나 디세사(Nina DiSesa)가 세계적인 광고대행사의 여성 CEO가 되었다. 이들은 메어리와 달리 조직의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유리천장을 깨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모델과 같은 외모로 여성으로서의 강점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경영인으로서는 여성성을 부정했던 메어리와 대조적으로 니나 디세사는 <유혹과 조종의 기술(비지니스 정글에서 승리하는 여자들의 성공법칙)>-원제는 <Seducing the boys club>-의 제목처럼 여자로서 유리한 점을 200% 살리라고 직설적으로 얘기한다. 올바른 방향으로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성(性) 자체가 개인이 갖고 있는 특성의 하나이다. 굳이 감추려 애쓸 필요 없이 활용하는 것이 바로 세계가 균형 있게 발전하는 한 모습이라 하겠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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