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바꾸기

입력 2008-10-25 18:46 수정 2008-10-25 18:46
 

말 바꾸기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가 짓고, 박병규가 옮겨, 도서출판 ㄸ님에서 2005년에 펴낸 <바람의 세기>란 책에 나온 “1984 보고서”란 제목이 붙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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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보고서




        미국 국무부는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인권 유린에 관한 자체 보고서에서 ‘살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살인’ 대신에 '생명의 불법적 또는 자의적 박탈‘이라고 써야 한다.

        얼마 전 CIA는 테러 교범에서 ‘살인’이라는 단어를 뺐다. 대신에 적을 죽이거나 죽이데 할 때 ‘무력화(無力化)한다’고 씌어 있다.

        또 국무부는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에 보내는 모든 군대를 ‘평화유지군’이라고 부르며, 미국 기업의 이익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살인자들을 ‘자유의 투사’리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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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식의 시도에는 분명 장단점이 있다. 우선 장점은 여기의 예로 하면 ‘살인’을 하는 무리들이 가질 수 있는 죄책감을 그야말로 ‘무력화’하거나 ‘박탈’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人)’을 ‘죽이는(殺)’ 것이 아니라 단지 힘을 빼거나 뺏어 버린다니 얼마나 상대적으로 부드럽게 유화된 표현인가!




        또 정확하지 않은 정도를 벗어나서, 기존의 뜻이나 의도와는 거의 반대의 의미를 지닌 ‘평화유지’나 ‘자유 투사’와 같은 용어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위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당사자들 다수에게 죄책감을 이겨내는 이상으로 정당성과 자부심을 부여할 수 있다.




        60년대말과 70년대 초 파월 한국군을 비유할 때, 대한민국 정부는 ‘자유의 십자군’과 같은 용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썼다. 그리고 대한뉴스를 비롯한 정부 홍보물에서 워낙 국민들에게 퍼부어대 강렬한 인상을 남겨서인지, 파월 한국군이 철수할 때 기껏해야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내게도 ‘자유의 투사’란 용어에 바로 ‘자유의 십자군’이 연상이 되었을 정도였다. 지금도 월남전 참전 용사 모임이나 블로그를 보면 ‘자유의 십자군’이란 명칭을 모임의 이름으로 쓰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자유’야 냉전시대에 그리고 참전의 명분용으로도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십자군’이란 용어 자체는 그야말로 역사의식의 빈곤함과 편향된 서구사대주의를 그대로 담고 있다. 1973년의 오일쇼크와 중동건설 붐에서도 ‘십자군’과 같은 부류의 정치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은 용어들이 마구 쓰였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역사의식 부족과 생각의 일천함을 보여주며 특정집단이나 지역을 폄하하는 용어들을 너무나도 많이 쓰고 있다.




        그 역사적, 정치적 진실성과 올바름의 부족이 단점들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게 한다. 갈레아노가 얘기한 미국 국무부나 CIA에서 기존에 익숙했던 용어를 다르게 변화시켜서 쓰이도록 하는 근본적인 의도가 단어 자체가 그 화자를 떠나서 갖는 기존 의미와는 전혀 동떨어져 출발한 것이다. 그들 자신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올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말 바꾸기가 편법이며 효력이 길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위에서 애기한 단기간의 홍보 효과 및 당사자들에 대한 기만책으로 술책을 부리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러한 작은 술책들이 근본적인 신뢰도를 떨어뜨리게 된다. 그렇게 떨어진 신뢰도를 회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된다 하더라도 아주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




        광고 자체도 어떻게 보면 말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띄기 좋게, 이해하기 쉽게, 한두 가지만을 내세우며 소비자들을 현혹한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단기간의 판매만을 위해서 편법으로 순간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문제점을 알고 있으면서 쓰는 경우에 아주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말은 될 수 있는 한 제대로, 기존에 쓰이는 형태 안에서 쓰도록 하자. 혹시 바꾸어 쓰는 경우에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감을 자지고 하자. 다수를 고통스럽게 하는 말 바꾸기는 금물이다. 마지막으로 장기적으로 쓴다고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고 불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도록 쓰자.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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