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물과 어느 목사님 형제

입력 2008-02-09 11:24 수정 2008-02-09 15:12


속물과 어느 목사님 형제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전날 본가에서 지내며 맘껏 TV프로그램도 보고 게임기도 즐긴 아이들을 앞세우고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이지만 집으로 걸어오는데, 갑자기 문익환 목사님 생각이 났다. 낮에도 항상 꽉 차 있던 아파트 주차장이 듬성듬성 이가 빠졌을 뿐이지만 훤히 트여 보이고, 해찰 부리며 어느새 뒤로 처져 재잘거리는 애들에게 고개를 돌려 소리를 빽 지르고 재촉을 하여야 하나 마나 고민을 하면서 갑작스레 아버지 문재린 목사나 어머니 김신묵 권사의 뒤를 따라 문동환 목사의 손을 잡고 만주 벌판을 걷던 문익환 소년은 어땠을까, 몇몇 분들의 책에서 전설처럼 읽었던 예전 수유리 한신대 교정에서, 그 문목사님이 오페라 연출가로 자라난 문호근 선생으로부터 후에 배우가 된 막내 문성근까지 데리고 다니던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문익환 평전”을 꺼내 다시 읽었다. 그러나 처음 읽었던 때처럼 만주 벌판이나 수유리 한신대 캠퍼스의 정경보다는 ‘속(俗)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그야말로 걸출한 한 집안의 얘기를, 한 인물과 그 주변의 이야기를 쫓아만 갔다.  




        아마도 현재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 문씨 집안이 ‘걸출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게 들릴 지도 모른다. 장차관 자리 하나 한 사람 없고, 기껏해야 교수 나부랭이와 오페라니 영화니 하는 딴따라들 몇 명이 나왔을 따름이다. 좀 어울리지 않게 문동환 목사가 80년대말에 제 1 야당이었던 평민당의 수석부총재를 한 것이 아마 세속적인 사람들 기준으로는 가장 크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문동환 목사님의 경우 내가 미국 주재할 때 마침 연수차 미국에 머물던 따님과 사위가 우리 가족이 다니던 교회에 다녔고, 교회의 목사님과도 잘 아는 사이여서인지 가끔 우리 교회에 사모님 문혜림(페이 문) 여사님과 함께 나들이를 하셨다. 지금 돌이켜 보면 예배 후 식사들 같이 하는데 거의 항상 연배 높으신 어르신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는 계셨지만, 그 때 말씀을 많이 들었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든다. 누군가 1994년 초의 문익환 목사 장례식에서 외쳤다는 “그래, 이렇게 해서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의 그 20세기의 ‘따로 또 같은 하나’, 평전 저자에 의하면 ‘특히 문동환과 누렸던 형제간의 우애와 경쟁의 뜨거움은 역사의 공간을 함께 갖지 않고서야 도무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그 분과 뉴저지(New Jersey) 한 구석에 함께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냥 제대로 된 말씀 한번 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두 분의 삶 모두 20세기 한국이 아니고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삶들이었다.




        공화파의 입장에서 스페인 내전을 기록했던 누군가가 스페인 내전을 ‘지식인이 자신의 믿음에 따라 행동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마지막 시기’라는 식의 정의를 내린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가 이후의 한국을 보았다면, 특히 문씨 집안을 보았다면 감히 그런 언급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물리적인 삶의 무대도 앞으로 어느 누구도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항상 찬바람 막막하게 불 것 같은 북간도 명동으로부터 일제말의 평양을 거쳐 세기말적인 발악의 기운이 짓누르던 동경에서 다시 광활한 만주 벌판의 만보산으로 들어갔다. 이어 혼란스런 해방공간의 서울에서의 고투를 거쳐 미국 뉴저지의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한국전쟁 휴전회담의 통역자로까지 서게 된다. 이후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시인으로 민주운동가로 통일의 선봉으로 평양에 다시 들게 되기까지의 역정이 과연 앞으로 누구에게 가능하겠는가? 그 역사적 공간과 시간의 의미를 문동환 목사께 1인칭으로 듣고 싶었던 것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평양의 숭실학교를 다니다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자퇴를 하고, 간도 용정의 광명학교라는 곳으로 편입을 하는데, 일본의 ‘대륙낭인(大陸浪人)’ 출신이 매입하여 일본식 교육을 시킨 학교였다. 5년제 정규학교로 편입할 수 있는 유일한 학교였기에 그곳으로 갔지만 문익환 목사 표현대로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었다. 광명학교 동창생으로 문익환 목사와 정반대의 생을 지내고 같은 날 세상을 뜬 사람이 있다. 육군 참모총장,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 대한민국에서 관운 좋기로 으뜸간다는 정일권이 바로 그다. 정일권이 바로 그 광명학교에 1938년 찾아와서 ‘군에 입대하는 것이 장래를 보장받는 길’이란 점을 강조하며 진학지도 연설을 했다고 한다. ‘개인’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하여, 당시 군에 입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와 여파를 미칠 것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이후에 그것이 후에 독립하였을 때를 대비하여 실력을 키운 것이라고 낯 두껍게 얘기하며 관운을 다투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 바로 대표적인 ‘속(俗)’의 길이다.




        문익환 목사의 영어는 원어민인 페이문 여사가 기가 죽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기품이 있었다고 한다. 문동환 목사는 고은 시인의 “만인보” 12권에 나온 바에 따르면 ‘...오랜 유학 생활이어서/ 영어로 먼저 생각하고 영어를 국어로 옮겨 말했다’고 한다. 백기완 선생이 어느 인터뷰에서 얘기한대로 파출소에서 영어 교과서 읆조렸다고 무죄로 방면해주는 그런 시대였고, 이후 지금의 전국민이 영어로 길안내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고 아이들은 소위 영어 몰입교육이란 것을 받아야 한다는 정도로 영어 광기에 더욱 깊게 젖어 가던 나라에서 우아하게 빛나는 장래를 보장 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바로 누구보다도 ‘속(俗)’의 길을 앞서 나갈 수 있던 그들을 그 반대의 길로 이끌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힘든 길을 찾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에 빠지기 보다는 반대의 부류를 찾아서 그에 대해 비난을 퍼부으며 쉬운 위안을 찾는다.





        아주 오래전 회사 동료들과 하는 어느 술자리에서 한 사람이 술안주로 올랐다. ‘아주 정치적이다, 곧 윗사람이 원하는 것은 미리 알아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다. 반면에 아랫사람에게는 무자비하기 그지없다’ 등등. 조용히 술잔만 홀짝거리며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최고 선배 하나가 불쑥 얘기했다. “야, 그 친구는 속물이라도, 내가 아주 존경하는 속물이다. 속물이 되려면 그렇게 해야 돼! 너희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는 놈들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 그 일갈에 모두 묵묵부답이었다. 모두들 부러움 한 자락 깔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뒤로 속물들을 안주거리로 올리는 일이 드물어졌다. 대신 두 문목사님 같은 분들을 상 위에 모시듯 올려놓고 존경과 감탄으로 시작해 조소로 넘어 갔다가, 심하게는 저주에 가까운 욕지거리 비슷한 외침까지 이미 어슴푸레해진 그림자를 향해 질러대며 끝내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에 함께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설날 귀가길 아버지 발걸음 제대로 따라오지 않고 까분다고 우리 애들에게 호통 치듯 하며, 동조자로 수준을 맞춰 떨어트려야 맘이 편했다. 아, 어찌 할 수 없는 속물이여!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

투표가상통화의 미래, 어떻게 생각하세요?

  • 현대판 튤립 투기이며 화폐로 인정받지 못할 것 713명 59%
  • 결제·지급 수단으로 인정받아 은행 대체할 것 493명 41%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