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오쿠라와 동경의 한국 문화재

입력 2006-12-03 21:33 수정 2012-01-24 10:19
두 오쿠라와 동경의 한국 문화재

 

      지난 주 일본 동경에 잠시 다녀 왔다. 2004년 6월 이후, 근 2년 반만에 동경에 간 것이었다. 2004년의 짤막한 여행기에서 일본이 '길고 긴 불황의 터널에서 빠져 나온 듯한 느낌을 바로 받을 수 있게 예전보다 활기찬 일본이었습니다'하고 쓴 적이 있는데, 굳이 롯뽄기(六本木)나 긴좌(銀座)의 고급 쇼핑가를 방문할 필요 없이, 자동차 바깥으로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아도 2004년보다 크게 변한 것은 없지만, 어느 정도의 활력은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전 정보를 받고, 공식 일정이나 방문지 외에 가장 흥미를 느꼈던 곳은 일행 중 몇몇이 묶었던 한 때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가장 좋은 호텔로 꼽혔다는 전통의 오쿠라호텔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오쿠라호텔로 가서, 그 곳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를 하기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호텔 경내를 둘러 보는데 바로 "오쿠라집고관(大倉集古館)"이 본관 건물 바로 앞에 있었다.

 

      그 유명한 '오쿠라 컬렉션'이 생각이 났다. 일제시대에 당시 조선의 문화재를 싹쓸이하다시피 했다는 오쿠라 컬렉션의 실체를 일부나마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그 때는 점심 약속 시간까지 남은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고, 더욱이 입장료까지 1천엔이나 하여 그냥 건물 주위를 산책하며 사진이나 몇 장 찍기로 했다. 들어가자마자 오쿠라 가문을 일으켰다는 창업자나 다름 없는 오쿠라 기하찌로(大倉喜八郞)의 좌상이 있고, 건물 뒷 편으로 돌면, 석탑 2기가 있다. 아무 설명판도 없이 서 있는데, 한국 사람이라면 누가 보아도 한 눈에 한국의 석탑임을 알 수 있다. 과연 건물 안에는 얼마나 많은 우리의 문화재들이 쌓여 있을 것인가, 확인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두 석탑이 굳혀 주었다.

 

      다음 날 운 좋게 오후 3시경 오쿠라 호텔에 잠깐 들른 이후부터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짜투리 시간이 생겼고, 오쿠라집고관을 가고 싶다는 얘기를 들은 오쿠라호텔에 묶고 있었던 선배가 호텔 투숙객용으로 나온 초대권을 주어서 공짜로 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건물 내부 동선은 오쿠라 기하찌로의 생애와 오쿠라상회 및 오쿠라집고관의 역사 안내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제법 긴 그 안내문에서 '조선(朝鮮)'이란는 단어 자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해외무역을 통하여 기업을 일으켰다는 식의 설명만이 있었다. '감추고 싶겠지'하며 나름대로 그렇게 쓴 저의를 추측했는데, 한 가지 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일본 최초의 사설 박물관으로서 '대창집고관'이 설립된 것이 1917년이라는데, 내가 아는 오쿠라컬렉션은 일제 중반 이후, 그러니까 2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수집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예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박물관부터 세우고 전시물들을 모은다는 것은 아귀가 맞지 않고, 그렇게 의문을 가지다 보니 어렴풋이 올해 산 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르는데, 역시 뭔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본격적으로 전시물을 보기 시작했는데, 마침 "도기에서 보이는 내세의 이상향-중국 고대의 삶과 꿈-건축·사람·동물-(陶器が語る来世の理想郷-- 中国古代の暮らしと夢―建築・人・動物―)"이란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서, 중국의 도기들이 전시물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그 외에는 극히 소수의 대창집고관이 자랑한다는 상설전시물들만이 몇 점 있었다.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전시물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하긴 한데, 한국인들이 문제 제기할 것을 막기 위하여, 일부러 한국 문화재는 전시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다음 날 집으로 돌아와, 관련된 책들을 찾아 보았다. 집에 있는 관련 책들이라야, 두 권인데, 모두 올해 출간된 것들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군인에서 상인, 그리고 게이샤까지』(다카시키 소지 지음·이규수 옮김, 역사비평사, 2006)과 『그때 그 일본인들-한국현대사에 그들은 무엇이었나』(다테노 아키라 편저/오정환·이정환 옮김, 한길사, 2006)이 바로 그 책들이었다.

 

      결론적으로 오쿠라 컬렉션의 오쿠라는 오쿠라 호텔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성(姓)도 비슷하게 발음이 되지만, 컬렉션의 오쿠라는 비교적 이른 1904년에 한국으로 건너와 고리대금업 등으로 돈을 벌어 대구전기회사를 1911년에 설립하며, 후에 팔도 전역에 전기 자매회사를 거느린, 지금으로 치면 민간기업으로서 한국전력을 소유했다고 할 정도여서 '조선의 전기왕'이라고 불렸던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갈 때까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여, 경남북 지방의 문화재를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루트를 활용하여 긁어 모았다. 전기회사이기에 지방출장소가 있었고, 그는 특히 경찰서장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여 유물의 밀반출을 쉽게 하였고, 탄광회사까지 소유하고 있어서 실질적인 도굴 행위에 버젓이 광부들을 활용하였고, 유물 운반에 심지어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국민학교 교장의 힘을 이용하여 어린 학생들까지 동원하곤 했다고 한다. 그가 대구 자신의 집 마당에 묻어 놓은 유물들이 1964년 당시 대구 방첩대의 지하실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었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재일동포 한 명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대구에 남겨 두고 온 자신의 유물들을 가져가려는 시도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196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소장품들과 함께 은둔 생활을 하다시피했고, 1981년에 '오쿠라 컬렉션 보존회'에서 1천여점이 넘는 소유 한국 문화재를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비로소 일본 안에서나마 대중에게 선을 뵈게 되었다.

 

      오쿠라 호텔의 오쿠라 기하찌로(大倉喜八郞)도 한국과의 인연이 깊고, 한국 문화재 반출에 일가견이 있었다. 오쿠라상회가 일본의 5대 재벌의 반열에 오르는 데는 강화도 조약 이후 발 빠르게 조선에 발을 딛은 것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일어나며 오쿠라상회는 대표적인 군수기업으로서 자리를 굳히고, 두 차례의 전쟁을 발판으로 조선 주둔 일본군이라는 안정된 고객을 확보하면서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오쿠라 기하찌로는 조선의 문화재를 반출하는 데도 어느 누구와도 필적하기 힘든 스케일을 선보였다. 경복궁에 있던 자선당(資善堂)을 통째로 옮겨서, 오쿠라집고관의 조선관(朝鮮館)으로 삼았다. 조선관을 따로 마련할 만큼, 이미 1917년경에 조선 문화재를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원래의 부지를 떠나 엉뚱한 곳에서 고생하던 자선당은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한 나라의 궁궐 안에 있는 건물이 객지에서 지진을 만나서, 정말 팔자에도 없게 명을 다한 것이다. 오쿠라집고관 정원의 두 탑은 각기 평양 율리사지 팔각오층석탑과 이천 향교방석탑이라고 하는데, 석가탑과 같이 소박한 모양의 이천 향교방석탑은 조선물산공진회에 장식물로 쓴 후, 조선총독부가 평양정거장 앞의 육각칠층석탑을 달라는 오쿠라 기하찌로에게 대체품으로 입막음용으로 주었다고 한다. 이런 오쿠라 기하찌로가 현재 선린인터넷고등학교의 전신인 선린상업고등학교의 설립자로 또한 한국에 자취를 남기고 있다.

 

      대창(大倉)과 소창(小倉), 두 오쿠라-일어로는 대창이 '오오'로 길게 발음이 되어서 약간 다르다-에 대해서, 집에 있는 책들 이외에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다보니, 오쿠라집고관의 두 석탑이 올해 5월에  한국의 TV프로그램에서 다루어지면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모방송국에서 '최근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고 조심스레 말은 했지만, 전문가를 대동하여 가서 거의 처음 발견한 듯이 정규 뉴스시간에까지 보도를 했다. 그리고 문제는 그 방송 프로그램이 나온 후 이런 충격적인 일이 있는가 식의 갑작스런 분노의 물결이 일었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언론인으로서 오쿠라 호텔을 드나든 사람들도 많았을텐데, 어쩌면 그렇게들 무심히 지나칠 수 있었을까?

 

      아마 그전에 두 탑을 본 사람들의 일부는 그 탑에 대해서 쓰는 것은 문화부 기자들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을 수 있다. 다른 부서의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거나 그것이 다른 식으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여지는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기사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종을 하지 못하고 낙종을 하면 특종한 것은 잊고 다른 곳을 찾아 보는데, 특종을 다시 한 번 더 깊이 혹은 다른 방향에서 파고 들어가면 또 다른 특종이 나온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해도, 그 사람들이 옳다는 강한 확신을,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기쁨을 안겨 줄 수 있다면 새롭지 않은 것이라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 광고에서도 정말 좋은 크리에이티브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누구나 다 알고, 그러기에 공감할 수 있는 얘기를 하라는 것이다.

 

      그 방송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방송 이후에 소창 오쿠라가 그 탑을 가져가서 자신의 박물관에 세웠고, 남은 유물들은 동경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고, 나와 비슷하게 착각을 하여 두 사람을 합체해서 버젓이 기사를 쓴 곳도 있다. 요즘같이 정보가 지천에 있을 때, 조금씩들만 수고를 하여 확인하고 글을 썼으면, 광고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예전의 신문이야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도서관까지 찾아가 마이크로필름을 보든지 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발행일 하루만 넘기면 되었으나 요즘은 나조차도 직접 관련이 없어도 관련된 신문기사를 찾고 있고, 틀리면 가차없이 지적하곤 한다. 광고에서 허튼 소리라고 여겨질 수도 있는 소리, 잠깐 비추기만 해도 난타를 당하게 된다. 내가 가지고 갈 수 있는, 어떤 경우에도 나를 방어할 수 있는 진실성의 방패는 크기가 어떻든 간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오후에 침대에 누워 낮잠을 청하며 읽던 중국의 작가 바진(巴金)의 수상록(隨想錄)인 『매의 노래』(바진 지음/홍석표·길정행·이경하 옮김, 황소자리, 2006) 중의 두 구절이 두 오쿠라 및 관련된 언론 보도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 속에 가슴에 확 와 닿는다.

 

'내가 보기에 가장 좋은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병이 있으면 병을 치료하고 병이 없을 땐 약을 먹지 않으면 된다.'

 

      나의 광고주에게 진실의 범위를 넘어서서 얘기하도록 이끈 것은 없었는지, 병이 있는데도 튼튼하니까 좀 더 놀아도 된다고 꼬신 적은 없는지, 병도 없는데 몸에 좋을 것이라고 약을 들이민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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