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의 힘과 허점

 

      탐 행크스(Tom Hanks)가 주연한 영화 "아폴로 13호"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아폴로 13호의 필사적인 귀환 도중에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기기를 우주선 안에 남아 있는 물품들을 이용하여 만드는 장면이었다. 우주선 안에 사용 가능한 물품들이 어떤 것이 남아 있는지를 파악한 나사(NASA)본부에서, 일군의 과학자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우주선 안에 있는 물품들과 동일한 양과 형태의 거의 쓰레기에 가까운 물건 조각들을 그들이 빙 둘러선 책상 위에 쏟아 놓고 30분인가 하여간 짧은 제한된 시간 내에 이산화탄소 제거 기기를 만들도록 한다. 기가 막힌 상태이면서도 단호하게 명령을 내려야 하는 약간 대머리로 시트콤 "사인펠드(Seinfeld)"에 나오는 조지(George)역의 배우처럼 생긴 아저씨의 명령을 내릴 때의 묘한 표정과, 그를 듣는 거의 망연자실한 표정의 과학자들의 모습이 우선 인상적이었다.

 

      그 과학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었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어쨌든 기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 과학자들이 우주선의 조종사들에게 연락을 한다. 그리고 만드는 방법을 아주 상세히 일러주기 시작한다. "자, 1번. 골판지 세 개를 책상 위에 펴 놓는다. 2번, 가장 왼쪽 것을 집는다" 등등. 영화에서 그들의 대사가 그렇게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어떤 과정을 거치는 것인지는 명확했다. 그들은 기기를 만들 때까지의 모든 단계를 아주 세세하게 매뉴얼로 만들어 절대절명의 단 한 차례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아폴로 13호의 우주조종사들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매뉴얼의 힘은 그런 것이다. 매뉴얼은 성공을 담보하지는 못하나, 보통 최악의 실패를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남자들이 "저 친구는 FM이야"하는 얘기를 하는데, 그저 '표준'정도라고만 생각했던 'FM'이 무엇의 약자이고, 실제로 어떤 뜻인지를, 군에 입대하여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마 지금도 모르고 쓰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FM'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FM'은 어처구니없는 그야말로 '개죽음'을 막아 줄 뿐이다. 아니, 그런 가능성을 줄여 주는데 의미가 있다. 아폴로 13호에서 우주선에 고립된 조종사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머릴 맞대고 고안을 했으면, 더욱 성능이 좋은 기기를 더 쉽게 만들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대로 기기를 만드는 데 실패했을 경우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 매뉴얼은 최악을 피하는 안전판인 것이다.

 

      광고의 세계에서도 '핸드북(Handbook)', '워크북(Workbook)' 등의, 타이틀은 다르게 붙여 놓고 있어도 따지고 보면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는 책자들이 있다. 이 책자들은 대부분 체크리스트(Check-list)와 같은 성격이다. 광고 관련 업무를 할 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을 일러 준다. 특히 마지막 광고를 방송이나 신문 등에 집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혹시 빠뜨린 것이 없나 점검을 할 때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매뉴얼들을 프로세스의 체크리스트가 아닌 해답을 제공하는 'Solution provider'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유감스럽게도 많다. 광고 매뉴얼에 나온 프로세스 자체를 컨베이어 벨트로 이루어진 생산공정으로 취급하면서, 투입요소(Input)이 같은데, 왜 이렇게 산출물(Output)이 다르냐는 엄청난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경영인 중의 한 분이시고, 한 해에 한두 차례는 꼭 찾아 뵙는 전임 제일기획 사장님 한 분이 계시다. 효율성과 그를 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화를 중시하시는 그 분께서 제일기획에 부임하셔서 본 제일기획 직원들의 행태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걸핏하면 밤을 새우며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밤을 새우면서도 발표하는 자리에 가서까지 수정을 하는 법석을 떤다고....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혀를 차시곤 하셨다. 시스템을 갖추는데 주력을 하시고, 직원들도 열심히 시스템을 활용했지만, 밤을 새우는 빈도나 발표회장에서 후다닥 수정하는 모습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조촐하고 조용한 술자리를 사장님과 가질 기회가 있어서, 약간의 술기운을 빙자하여 왜 별 변화가 없는지 말씀을 드렸다.

 

      "사장님, 광고는 정답이 없지 않습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약간만 이 부분 바꾸어 보면 좋을 것 같고 한데....그런 생각이 계속 물리적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순간까지 납니다. 하나님이 시스템을 만들어 주셔도, 끝까지 고치고 있을 거에요. 어느 순간에 생각을 멈추라는 것은 될 수 가 없는 얘기에요."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버릇없이도 엉겨 붙은 듯 한데,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너그럽게 봐 주셨다. 그러고 보면 가끔씩 비슷한 식으로, 인내심의 경계 근방까지 가면서 말씀을 드리곤 했던 것 같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시는)시스템에 의한 효율성과 (광고회사에 정말 필요한)틀을 깨는 창의성은 반비례"한다는 얘기에는 일순 '이 놈을 어떻게 할까'하는 찬바람 부는 표정을 짓다 피식 웃음으로....

 

      사실 매뉴얼이나 정형화된 시스템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것을 구비하는 것이 어쩌면 1차적인 발전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그것을 제대로 지키게 되고, 가장 높은 단계의 발전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예전 "사랑방 중계"라는 TV프로그램에서 '세대차이'를 주제로 다른 적이 있었다. 어느 중학교인지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세대차이를 정의하는 메모를 받았는데, 한 학생의 다음과 같은 정의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주(主)패널이었던 영화평론가, 정영일 선생께서 '오늘의 장원'이라며 박수를 치셔서 더욱 기억에 선명하다.

 

      '세대차이란 내가 계량컵 가지고 쌀과 물 맞추고, 시계 가지고 끓는 시간 맞추어 가며 지은 삼층밥과, 어머니께서 바가지로 푹푹 떠서 지으신 맛있는 밥.' 

 

      비록 실패가 거의 없는 매뉴얼을 충실하게 지키면서도 삼층밥을 짓기는 했지만, 그 친구의 경우 매뉴얼을 넘어선 효력을 발휘하는 '인간' 본연의 그 무엇을 발견하면서, 오래지 않아 어머니와 같은 경지에 올라 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친구가 계속 계량컵과 시계로 무장하여 맞추고 있었어도 아마 어느 정도 수준의 밥은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지으신 것과 같은 맛있는 밥은 결코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어느 조사회사는 수 천 편의 TV 광고물 조사를 통하여, 초(秒) 단위로 광고물을 분석하여, 최선의 광고물은 시작한 지 몇 초만에 인물이 등장하고, 어떤 색상을 쓰고, 마지막 슬로건은 몇 초 동안 내보낸다 식의 얘기를 했다. 그 조사회사에서는 나름대로의 평균(Norm)이란 식으로 그 결과들을 발표했는데, 놀랍게도 그 공식에 맞추어 광고를 만들라는 주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 몇 년 동안의 히트곡들을 모아서, 위치별로 가장 많이 쓰인 음계들을 모아 놓으면 좋은 노래가 나올까? 더욱 놀라운 것은 거꾸로 그런 평균(Norm)들을 기준으로 광고나 노래를 평가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삼층밥을 지었어도 매뉴얼대로 했으면 맛있는 밥이라고 평가를 하는 식이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것은 오래도록 그런 삼층밥이 잘된 밥이라고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에 그렇게 입맛이 바뀌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또 씁쓸하지만 매뉴얼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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