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호흡하는 브랜드-까르띠에

입력 2006-07-25 10:17 수정 2006-07-25 10:17
브랜드는 브랜드 자체로 존재한다는 식의 분석을 자주 보게 된다. 그 배경으로서, 브랜드를 통하여 시대를 읽고, 시대가 어떻게 브랜드에 반영되었는지 보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브랜드의 장수 비결과 성공의 열쇠를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와 함께 호흡한 대표적인 브랜드로 까르띠에를 대상으로 썼던 글. 그런 색깔을 지우려 애를 썼지만, 까르띠에 홍보대사 같은 느낌도 줄 수 있어 약간은 당황스럽기도 하다. 초점은 사실 좀 다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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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Cartier)-시대정신을 반영한 예술과 기술의 결합

 



      '예술'과 '기술'은 그리스어로는 같은 의미라고 한다. 사전에 나온 뜻에 따라 구분하면 예술은 사람의 미적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을 만들거나 미적 감각을 나타내는 활동이고, 기술은 과학적 기능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사전적인 정의일 따름이고, 특정한 물품을 '예술품'이냐 '기술의 산물'이냐로, 특정 행위를 '예술 행위'인지 '기술 행위'인지 구별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특히 시대에 따라 예술과 기술의 경계선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리가 지금은 예술품이라고 박물관에서 감상하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많은 조형물과 조각 작품들을 만든 사람들은 기술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또는 육체노동자의 신분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체념 속에 자신의 도구들을 움직여 댔을 것이다. 근대 이전의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예술이란 것은 선비들의 '시(詩)·서(書)·화(畵)'에 국한되어 있었고, 물리적인 형체를 만들어 내는 공장(工匠)들의 활동은 잔재주로 치부되었다. 공자(孔子)님께서 '선비는 덕(德)을 본(本)으로 하고, 재주를 말(末)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영향이 몇 천년을 두고 지속되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근본적으로 절대왕정 시대하의 고정된 신분제와 각 계급의 역할이 규정된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예술과 기술의 경계선에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할 수는 없었다.




역사적 변혁 속에서 태어난 명품




      사회 전체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인 변화가 결국 예술과 기술의 확고한 구분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대략 서구사회에서는 19세기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정치와 과학 각 분야의 두 가지 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첫째 절대왕정체제와 그를 바탕으로 한 편협하고 완고하게 각 계급의 역할을 규정한 계급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절대왕정체제에 균열이 생긴 것은 내재하고 있던 봉건적인 모순이 폭발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왕과 귀족들이 설정해 놓은 역할을 능가할만한 능력을 소유하게 된 새로운 형태의 시민들, 곧 우리가 보통 부르죠아지(Bourgeoisie)라고 부르는 자산가계급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산가계급은 증기기관의 발명을 비롯한 과학 기술의 급격한 발전에 따라 가능했다.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농민들이 공장노동자로 유입되면서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사회체제가 무너지면서, 자본이 중심이 되는 사회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 자본의 주인으로서, 시대의 새로운 리더로서 떠오른 시민계급의 출현을 가능케 한 기술의 발전이 바로 두 번째 축이다. 까르띠에(Cartier)는 이러한 변화의 한복판에서 태어나, 이후 150여년 동안 시대정신과 호흡하면서 예술과 기술의 경계를 허물고, '전통'과 '첨단'이라는 일견 모순되게 보이는 두 가지를 한 몸에 구현시켜 오며, 명품(名品)으로서의 위상을 굳혀 왔다.

 

      나폴레옹 1세의 화려했던 치세가 끝나고, 소위 승전국으로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국가의 왕과 귀족들이 강요한 소위 '1815년 체제'라고 불려지는 복고(復古)체제와, 그에 상반된 이미 혁명을 경험한 시민계급의 정치적 욕구가 부딪히며 극심한 혼돈과 좌절과 고통의 시기에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인물과 사회상을 갈망하던 기운이 폭발할 지경이던 1847년 프랑스 파리에서 루이-프랑스와 까르띠에(Louis-Francois Cartier)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영광된 시절로서의 기억만이 다시금 빛을 발하게 만든 메시야와 같은 인물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3세였다.  선거로 대통령 직위에 오르고 그 체제를 스스로 깨뜨리며 '제 2 제정'을 연 나폴레옹 3세 시기에 파리는 명실상부한 문화와 유행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으며, 황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 문화가 자본의 힘과 어우러져 색다른 꽃을 피웠던 시기였다. 까르띠에도 황제의 사촌, 황후을 고객으로 확보하며 든든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여기서 예전의 우리가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나 하이든(Franz Joseph Haydn)과 같은 유형에서 보았던 예술가에 대한 일방적인 후원에서, 수요자와 공급자의 계약에 기초한 상호존중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며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 제위에서 물러나 영국으로 망명을 했지만, 오히려 국제적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만드는 시기가 되었다. 세 아들들을 경영에 참가시키면서 프랑스의 사업장도 파리의 우아함과 귀족적 취향의 중심부로 옮기고, 런던과 뉴욕의 고급 쇼핑가로 진출을 한 것이다. 이들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가까운 영국의 황실로부터 받은 "영국 황실의 보석상"이란 칭호로부터 스페인, 포루투칼, 루마니아, 이집트, 모나코, 알바니아, 그리고 러시아 짜르(Tsar)가에까지 보석을 공급하게 되며, '영국'이란 한계를 벗어나 "(세계)왕들의 보석상"이란 칭호를 얻게 된다. 즉 특정 왕국에 소속되지 않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보석상으로 위상을 높인 것이다. 그 여행 중에 록펠러(Rockerfeller)와 포드(Ford) 등 미국의 근대산업계의 리더들을 만나 고객으로 확보한 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 준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하겠다. 바로 그들이 어떻게 보면 현대 자본주의시대의 새로운 왕들이었던 것이다.




기술이 뒷받침된 새로운 예술 사조의 도입




      신분적인 측면에서의 인정에 이어,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융합시키는 까르띠에로서의 명성은 시계를 통하여 먼저 꽃을 피웠다. '미스터리 클락(Mystery clock)'과 같은 특허권까지 받은 기술적 혁신의 바탕 위에 플래티늄을 비롯한 새로운 재료의 보석을 까르띠에의 정교한 세공기술로 다듬은 아름다움이 구현된 시계들을 연달아 내놓았다. 대표적인 히트 품목으로 1904년 브라질의 열기구 비행사인 산토스(Alberto Santos-Dumont)을 위한 선물로 제작된 산토스 시계, 1919년 제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탱크에서 디지안의 모티프를 잡은 '탱크' 시계가 있다. 산토스 시계의 경우 새로운 영역인 하늘을 개척하고자 했던 20세기 초 인류의 꿈, '탱크'는 승전의 축하 무드와 신기술의 위대함에 대한 헌사라는 시대의 기운을 담고 있던 작품들이었다. 둘 다 모두 까르띠에의 대표적인 라인 중의 하나로 이후에도 계속 새로운 형태로 새로운 시대의 기운을 반영하여 까르띠에의 전통과 활력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산토스 시계는 1978년 골드와 스틸을 대담하게 결합한 아방가르드적 디자인으로, 탱크 라인은 1989년 시계공학과 보석 분야가 미국적인 실용성과 결합된 '탱크 어메리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1차 대전 이후 기하학적인 형태에 바탕을 둔 '아르데코(Art Deco)' 디자인의 대표주자로 까르띠에의 작품들이 주목을 받으면서도 '예술을 위한 예술'로만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던 데는, 자연주의를 가미시킨 팬더를 비롯한 동물 모티프를 차용한 디자이너 쟌느 투쌍(Jeanne Toussaint)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다재다능한 예술가로 이름 높은 쟝 콕토(Jean Cocteau)와, 두 쌍의 세기의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위하여 왕위를 버렸던 윈저공(Duke of Windsor)과 그의 부인, 화려한 결혼과 이별을 반복했던 리처드 버튼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유명인사들의 열렬한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러한 고급 소비를 이끄는 충성심 높은 고객층의 후원과 무엇보다도 기술과 예술이 융합된 20세기적 새로운 디자인 사조를 대표하는 브랜드로서 까르띠에는 타원형의 라이터로 공전의 히트를 친 후, 1973년 브랜드를 다양한 부문으로 확장시킨 '머스트 드 까르띠에(Must de Cartier)'라인을 출범시켜,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로서의 지위를 굳건하게 한다.




문화 그 자체가 된 까르띠에




      '시대정신이 반영된 기술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까르띠에의 브랜드의 특성이 집결되어 이루어진 공간이 바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다. '자유와 무편견'이라는 공간 구성의 컨셉트가 바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창의의 가능성을 한껏 열어 두는 까르띠에다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006년 6월부터 10월까지 영화감독이자 비디오 예술가인 아그네스 바르다(Agnes Varda)의 '누아르무띠에(Noirmoutier)'섬을 주제로 한 작품전이 열린다. 전시는 크게 비디오 작품과 영화로, 작품 소재는 섬과 섬을 둘러싸고 있는 물로 나누어진다. 바르다는 각각의 작품들은 다르지만, 서로 잘 어우러져 그녀의 '섬을 (관람자들이) 재구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까르띠에도 바로 소재와 용도는 다르지만, 기술과 예술이 아우러져 사람들이 시대에 맞추어 나름대로 그 의미를 추출하도록 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명품으로서 지난 150년 이상 까르띠에를 이끌고 온 원동력이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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