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를 기억하십니까?

입력 2006-01-24 18:20 수정 2006-01-24 18:20
오노를 기억하십니까?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현장에 기업들이 올림픽을 마케팅에 어떻게 이용하는지 조사한다는 미명하에 방문을 했었다. 당시 삼성전자의 올림픽 현장 관리를 하고 있던 선배의 호의로 스폰서 표찰을 달고 몇몇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숏트랙 결승 경기였다. 스폰서 기업들에게 나오는 표찰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최고 등급의 표찰을 받아서, 어떤 자리이건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어서, 링크 중간 스탠드로는 심판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열 바로 위의 두 번째 좌석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특별석이었는지 주변이 휑하니 비어있었는데, 우아한 차림의 노부부가 옆자리에 와서 앉아 인사를 하고 얘기를 건네니, 솔트레이크 올림픽 조직위원장 부부였다. 약간 유난스럽게 말이 많다 싶은 아주머니의 말씀인즉슨 숏트랙이라는 종목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동계 올림픽을 치르면서 보니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종목이 숏트랙이란다.

 

      첫 번째 경기는 여자 릴레이 결승이었다. 숏트랙 경기를 경기장에서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종목이라는 아주머니의 말씀이 과장이 아니라고 느낄 정도로 재미있었다. 주자 교체를 하면서 엉덩이를 밀어 주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계속 중국팀의 뒤를 살짝살짝 뒤쫓다가 한 순간에 주자 교체를 건너 뛰면서 선두로 치고 나가 결국 결승점까지 내달리는 전략도 한 치의 어김도 없이 감동적으로 실행이 되었고,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면서 태극기를 들고 링크를 도는 모습에서는 나도 목이 메이고, 참으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 눈 앞이 흐릿해졌었다.

 

      여자팀 우승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김동성과 오노가 등장한 문제의 경기가 벌어졌다. 여자 피겨 스케이터인 미쉘 콴(Michelle Kwan)을 빼면 아마 오노가 당시 동계 올림픽에서 최고로 인기를 끈 미국인 선수였을 것이다. 오노가 서서히 링크로 나오면서 거의 대부분의 미국인 관객들이 일어나서 박수와 환호성으로 그를 맞이했고, 상당수는 오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텃수염을 모방한 까만 테이프나 색종이를 턱에 붙이고 발을 구르며 열광하고 있었다. 경기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박빙의 차이로 김동성이 줄곧 앞서 나가고, 마지막 순간에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이 나왔고, 몇몇 관중들이 동요를 하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은 김동성의 우승을 당연하게 받아 들였고, 내 옆에 앉은 아주머니와 조직위원장도 한국팀이 연이어 금메달을 획득한 것을 축하해주며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김동성은 태극기를 건네 받아 들고 링크를 도는 것과 동시에 오노측의 항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객석의 분위기가 반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내 좌석 바로 밑 줄에 앉은 심판들의 얘기가 심상치 않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김동성의 실격 발표가 나고,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지 링크를 돌다가 한참 심판진 쪽을 보면서 서 있던 김동성은 손에 들고 있던 태극기를 동댕이치고 한참을 노여움과 억울함과 슬픔이 어우러진 표정으로 심판진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김동성의 그 망연자실함과는 대비되게 미국인 관중들은 환성을 터뜨렸지만, 뭔가 찝찔하여 경기 시작 전 오노가 등장할 때만큼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어떻하지? 미안해. 양해해줘'하는 식의 표정을 짓는 아주머니에게 '미국도 금메달 하나 따서 잘되었다'고 얘기하며, 악수를 하고 경기장을 나서는데, 한국 취재진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 심판석을 향하여 독백과 같은 항의의 외침을 전하고 있었다.

 

      다음다음날 뉴욕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접속하니, 판정과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에 대한 비판도 비판이지만, 김동성이 국기를 팽개쳤는지 여부를 두고 들끓고 있었다. 김동성 선수가 본인 실격 판정을 듣고 우리가 화가 났을 때 가끔 들고 있던 물건을 집어 던지듯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당시 들고 있던 것이 국기였으니 그것을 팽개치는 것으로 보았고, 그것이 그리 큰 논란거리가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장면 하나하나가 초 단위로 분해되어 스케이트 날에 걸렸다느니 그래서 황급히 다시 집어 들었다는 것을 보면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내가 직접 본 그 때의 장면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이 그 경기 얘기를 하면서 현장 분위기를 물으면서, '태극기 내동댕이 사건'의 진실 여부를 묻는데, 기대에 반할 것 같기도 하고 실제장면이 헷갈려서 명확하게 대답을 해주지 못하곤 했다.

 

      며칠이 지나 당시 정치평론가로 활동을 하던 유시민 선생이 모 인터넷신문에 기고한 '태극기 던졌으면 또 어때?'라는 글을 읽고, 무릎을 쳤다. 80년대 명문 중의 하나로 꼽히는 '항소이유서'를 가슴 뜨겁게 읽었지만,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마지막 문장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펼쳐지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그를 얽어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는데 그 글에서 어떤 상징물에 얽어매이지 않는 한 차원 더 높고 넓어진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포용력을 보게 되어 반가워서였다.

 

      이 글을 쓰면서 김동성 태극기 동영상도 다시 확인을 했는데, 정말 잘 모르겠다. 아마 김동성이 태극기를 내던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스케이트 날에 찝힌 것으로 보일 것이고, 화가 났으니 던질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면 내던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위에서도 썼듯이 현장에서 나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던진 것으로 보았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 영어로 그야말로 '팩트(Fact)'이지만 어떻게 이야기하고 보여 주냐에 따라서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즉 광고를 포함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이자 방법은 어떻게 보면 똑같은 재료, 팩트들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식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런데 팩트 자체에만 매달려서는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국기에 매달려서 애지중지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면 윽박지르는 편협한 국가주의가 진정한 애국심을 기르지 못한다. 오히려 나의 국가를 떠나, 인류 전체를 생각하는 데서, 그 국가의 위상과 격이 높아진다. 내 제품의 특정 기능이나 기술을 얘기하는 데 치중해서는 결코 선도적인 위치에 오르지 못한다. 카테고리 전체를 생각하고, 그것이 고객의 생활에 어떤 혜택을 줄 것인가 대승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리더의 길이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

투표보험설계사·택배기사 등 노동3권 보장, 어떻게 생각하세요?

  • 특수형태 근로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교섭을 통해 권익을 보호받을 것 382명 37%
  • 4대 보험 적용 등 고용주의 부담이 늘어나면 일자리가 되레 줄 수도 우려 648명 63%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