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결과 조작(?)의 경험

입력 2005-12-18 05:56 수정 2005-12-18 05:56
조사 결과 조작(?)의 경험

 

      90년대 초의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식품 광고가 한국을 대표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광고 초년생의 속을 썩이던 모 식품회사의 음료제품이 하나 있었다. 무언가 우리 나라 소비자에게는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던 제품이었다. 도저히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설 컨셉트를 뽑지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다. 광고 회사인 우리 측에서 먼저 해당 제품은 미래가 없으니 시장에서 철수하고 생산라인을 없애라고 정식으로 제안을 할 정도였다. 광고주 회사의 실무자는 제품라인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는 우리의 얘기에 끄덕이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사장이 도입한 제품이기 때문에 없앨 수가 없고, 광고라도 크게 한 번 틀어야 한다고 사정조로 얘기를 했다. 결국 우리는 광고 모델 파워에만 의존하여, 광고를 만들기로 하였다. 당연히 모델을 누구를 쓸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목표고객 그룹에게 인기가 있던 연예인을 중심으로 좁혀 들어간 끝에 마지막으로 두 명의 모델로 압축하여, 둘 중에서 하나를 최종 선정하는 조사의 진행이 내게 떨어졌다. 하나는 광고 모델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탤런트로서도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부드러움과 터프함을 함께 간직한 친구였고, 다른 하나는 히트 곡 하나를 내고, 두 번째 앨범을 발표하려 준비하고 있던 귀여운 용모의 남자 가수였다. 서로 성격의 차이도 명확하고, 이미 각각의 모델들을 가지고 어떻게 광고를 찍을 것인지 대략적인 콘티까지 나와 있어서, 그리 힘든 조사는 아니었다. 설문에 따른 정량에서도 차이가 확실히 났고, 조사 진행을 하면서 참석자들과 얘기를 나누어 봐도 탤런트 출신의 친구에게로 쏠린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보고서 쓰기 수월하겠구나 생각하는 순간에 조사를 참관하고 있던 광고주 실무자와 담당 AE(Account Executive)의 당황한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어떤 배경이 있었는지는 지금도 확실히 모르겠으나, 실무자 선에서는 이미 가수 출신의 모델을 쓰기로 결정을 내렸고, 그 매니저와 거의 모든 얘기를 끝내 놓은 상황이었다. 추측으로는 한정된 광고제작비로 탤런트 모델의 출연료는 도저히 소화할 수가 없는데, 사정 모르는 광고주 상층부에서 그 탤런트 모델을 고려하라는 압력이 있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나마 가수 출신의 모델도 시간이 지날수록 출연료가 올라갈 것이 뻔해서 미리 가계약식으로 해 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결과가 한 쪽으로 완전히 치우쳐서 나왔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광고주 실무자는 AE와 몇 마디의 얘기를 나누고는, 이틀 후에 조사결과를 보고하겠으니 준비해 달라는 얘기만을 남기고 떠났고, 이후부터 회사 한참 선배인 담당 AE의 처절한 애원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확연히 차이가 난 것을 어떻게 뒤집어서 얘기합니까?" 당시 둘의 수치상으로 나타나는 차이는 5점 만점에 전자가 4.3~4.5, 후자가 3.5~3.7 정도였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의 비율로 보면 전자가 80% 이상, 후자는 65% 수준이었다. "뒤집어 달라는 얘기가 아니고, 조사자의 양심을 거슬리지 않는 수준에서 좋은 방향으로 얘기를 해 달라는 것이지?!" 어려운 주문이었다. 나의 양심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겠고,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해야 할지, 광고회사에서의 경험이 채 1년도 되지 않았던 애송이로서는 처리하기 힘든 문제였다. 그러나 선배의 집요함과 눈 앞으로 다가온 마감 기한 앞에서 당시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최대의 타협을 하고 말았다.

 

      우선 보고서에서 전자와 후자의 직접적인 비교를 절제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연예인으로서의 인지도 차이와 같은 항목은 차이를 그대로 비교하며 얘기를 하였으나, 해당 제품 광고와 관련되어 나는 차이 부분은 각자 따로 아주 건조하게 얘기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전자의 미세한 약점은 부각시키고, 후자의 약점은 강점으로 해석하여 강조하는 방식을 취했다. 전자의 경우 이미 소위 잘 나가는 모델의 반열에 거의 올랐기 때문에 겹치기 출연에 대한 우려가 몇몇 조사 대상자에게서 표현이 되었었는데, 우리 제품의 취약한 브랜드력을 감안하면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반대로 후자는 취약한 대중적인 인지도를 신선도라는 것과 연계하여 우리 제품과 잘 맞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해석을 힘 주어 얘기했다.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는 조사자의 양심이라는 것이 표현상의 꽁수 보다 더욱 작용하지 않을 수 없어서, 조사 결과는 전자가 좋기는 하지만, 후자도 긍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조사 보고에 이은 회의에서 약간 혼란스럽게 다른 의견이 오가기는 하였지만, 노련한 AE 선배와 광고주 실무자의 측면 지원에 힘입어 후자를 모델로 채택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광고는 가수의 두 번째 히트곡과 거의 동시에 TV에 방영되기 시작하면서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소위 '대박'을 쳤다. 제품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그저 모델이 제품을 손에 들고 춤을 추면서 보여 주는 것 밖에 없는데, 광고가 나간 한 두 달 사이에 연 매출 목표량 이상의 실적을 올렸다. 그런데 그 광고의 제작을 맡으셨던 분이 직접 제작에 들어가기에 앞서 광고주 실무자에게 그 해의 매출 목표를 묻고 답을 들은 후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올해 매출 목표의 한 배 반을 바로 달성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배 반 목표 달성하면, 이 라인을 없애겠다고 약속해 주시요. 애들이 (광고에) 혹해서 한 번은 사 먹겠지만, 다시 (제품을) 찾지는 않을 거요." 광고 실무자가 얘기를 들으면서는 의아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그만한 힘도 없었고, 일단 제품이 마구 나가기 시작했는데, 시장에서 바로 철수를 하라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그 제품은 원래의 목표에서 네 배 이상의 매출 계획을 잡고 의욕적으로 유통을 확장했다가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퇴출되어 버렸다.

 

      똑같은 숫자나 상황이라도 표현하는 방식을 각기 다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본질까지도 왜곡시켜서는 표현의 다양성이란 영역을 넘어서 조작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위에서 얘기했던 사례에서 내가 한 일은 어느 부분에 속한 것인지 확실히 모르겠으나, 애송이 광고인에게 광고의 여러 세계를 가르쳐 준 뜻 깊은 경험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꼭 모델이 아니더라도, 광고안 몇 개를 가지고 조사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100% 조사에서 나타나는 수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위의 사례를 들어서 얘기하곤 한다. 물론 잘 먹히지 않는 경우도 많다. 개인의 호오(好惡)가 정해져 있는 경우에는 어떤 얘기를 해도 선택적인 수용만을 할 따름이다.

 

      광고야 현재까지는 객관적인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과 연관된 부분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엄연한 객관적인 사실 혹은 쉽게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을 놓고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처음의 발단자도, 중간의 검증자도 문제이겠지만, 제대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주위의 직간접적 관련자들이 호오의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열린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 쪽에 속하여 편을 가르고, 자기의 귀와 눈에 맞는 것들만을 받아 들여서 소리를 높일 태세인 바에야 무슨 조사가 필요하겠는가? 예전 '10대 가수 가요제' 같은 곳에 단골로 등장했던 '박수계'같은 것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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