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 Day보다 더 극적인 순간

입력 2005-05-10 22:10 수정 2005-05-10 22:10




V-E Day보다 더 극적인 순간




        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장에서의 나치 독일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유럽 전승기념일, 영어로 줄여서 ‘V-E Day'가 바로 5월 9일이다. 올해는 특히 전승 60주년을 기념하여,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노무현 대통령까지 포함하여, 세계 60여 개국의 정상들을 초청하여 기념일 사상 가장 성대한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고 한다. 2차 대전 종전 이후부터 근래까지, 아니 지금까지도 냉전으로 인한 정보의 편향과, 미국과 서구 국가들의 주로 영화를 매개체로 한 현란한 선전술로 구소련 러시아의 2차 대전 유럽 전장에서의 역할은 대단히 과소평가되어 왔다.

 

         실제 국민 중 1% 미만의 희생자만을 낸 연합군 측의 주요 국가에 비해서 구소련은 약 15%에 이르는 국민들이 희생되었고, 독일군 사상자의 80% 이상이 소련과의 전투에서 발생했다. 우리가 전쟁의 전개 흐름을 바꾸었다고 믿어 왔던 노르망디 상률작전은 이미 그로기 상태에 빠져 로프에서 허우적거리던 상대에게 아주 비효율적으로 우악스럽게 달려든 정도에 불과했다. 큰 펀치만 연거푸 휘둘러 상대가 이미 힘이 빠져 있었기에 망정이지, 스필버그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첫 장면에 묘사된 것처럼 독일군이 약간이라도 반격할 여지가 있는 수준의 힘만 갖추고 있었어도, 노르망디 해안은 미군들이 주인공이 되어 아우슈비츠와 별다르지 않은 장면을 연출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대대적인 전승기념일 행사는 그런 한국인들을 비롯한 서구인들의 편견을 어느 정도 바로 잡으며, 한편으로 푸틴은 되살아났다고 우기고 싶은 러시아의 새로운 위풍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런 잔치에 가서 부시 대통령은 마치 환갑잔치에 초대받아 가서 주인공이 원래 천하의 난봉꾼이었다가 자신에게 혼나고 정신을 차렸다는 식의 되먹지 않은 인사말을 하는 망발을 저질렀다. 어쨌든 구소련, 지금의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CIS 국가들에게 2차 세계대전은 ‘위대한 조국 전쟁’의 ‘위대한’이란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역사적 사건의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보통 엘베강에서의 소련군과 미군의 악수, 화염 연기를 배경으로 소련기가 제국의회 지붕 위에 게양되는 모습 등을 얘기하는데, 꼭 한 장의 사진으로 남지는 않았더라도 더욱 인상적인 순간들이 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 전 소련에서는 10월 혁명 기념일이 가장 큰 행사였다. 또 그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크레믈린 광장에서의 붉은 군대의 위용을 자랑하는 흡사 우리 국군의 날 시가행진과 같은 분열 행진이었다. 혁명에 반대하는 소위 백군과의 처절한 내전을 겪었던 붉은 군대에게 그 행진은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1941년 독일군이 모스크바 20Km 반경에까지 진격을 했고, 더욱이 제공권을 독일군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대규모 군사병력을 크레믈린 광장에서 행진을 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대부분의 소련 사람들이 그리고 독일군마저도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스탈린은 11월 6일 혁명 기념일 전날 크레믈린 광장 근처의 지하철역에서 러시아의 민족혼을 일깨우는 연설을 하였고, 다음 날은 대담하게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행진 행사를 치렀다. 그리고 그 행사장에서의 연설에서 스탈린은 러시아 역사상의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영웅들의 이름과 행적을 나열하며 조국 러시아를 위하여 전국민이 궐기할 것을 촉구했다. 결코 나치 독일의 힘에 굴하지 않는 러시아 천년의 힘이 살아 있음을 만방에 알린 11월 7일 붉은 광장에서의 대담했던 행진과 스탈린의 연설이 나는 실질적으로 나치 독일의 패배를 알린 전주곡이 되었다고, 유럽에서의 2차 대전 중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히틀러가 레닌그라드의 전 시민을 굶겨 죽이겠다는 무자비한 발언을 하면서 그것을 철저한 포위 봉쇄하는 가운데, 혹독했던 겨울을 이겨내고, 전쟁의 상처 속에서도 푸르른 신록을 꽃피웠던, 겨울의 혹독함 때문에 더욱 서럽도록 아름다운 푸르른 여름을 맞이한 1942년 8월 9일 레닌그라드 전 시가에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흔히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연주가 울려 퍼진 순간은 그 후 3년을 더 끌기는 했지만, 소련의 승리를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심장의 피로 씌어진 곡’이라는 누군가의 묘사처럼, 도시 경계선 너머에 포위선을 펼치고 있었던 독일군들은 울려 퍼지는 그 곡을 들으면서 전율과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아마 그들은 승리자로 자신들의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전조를 진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전환점이 되는 그런 극적인 순간은 대담함과 함께 의외성을 요구한다. 틀에 박힌 연출로는 뻔한 결과만 가져 올 뿐이다. 틀에 박힌, 얌전한, 상궤에서 어긋나지 않는 광고나 마케팅 활동으로 극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시간에, 의외의 도구로 잠자고 있는 소비자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드는 그런 행동이 필요하고, 항상 그런 계획들을 짜내기 위하여 광고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노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의외성 때문에 광고주를 설득하지 못하고 좌절하곤 하지만, 그 극적인 순간이 현실화되는 짜릿한 기억을 잊지 못하여 또는 그 기대로 또 하루 하얀 밤을 새곤 한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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