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앞 룸살롱판촉원과 주엽역 사과 아줌마

입력 2003-09-01 10:29 수정 2003-09-01 10:29
얼마 전 점심 때였습니다. 시청 앞 삼성빌딩 로비에서 사람을 만났지요. 강남에서 모처럼 강북으로 진출한(?) 아는 이와 미국에 유학갔다 온 지 얼마 안된 그이의 딸과 함께 강북 냄새 물씬 나는(약간 허름하지만 사람 바글바글한) `진주회관`에 갔습니다.




유명한 김치볶음밥과 콩국수를 함께 시켰더니 점심시간엔 바빠서 볶음밥을 해줄 수 없다기에 도리 없이 콩국수로 통일했습니다. 고소한 콩국수도 괜찮았지만 엄연히 주메뉴로 돼 있는 김치볶음밥을 제쳐놓고 콩국수만 강요하는 건 영 언짢았지요. 그렇다고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마땅치 않고 해서 그냥 먹었습니다.




손님을 너무 소홀히 대접한 듯해 커피는 삼성플라자에서 마시기로 하고 나오는데 길에서 한복을 곱게 입은 아가씨들이 부채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무심코 지나치려는데 동행인이 다가가더니 "나도 줘요"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쩌자고` 싶었지만 그래도 줄 줄 알았지요. 그러나 그 아가씨는 "이거, 룸살롱 판촉행산데요" 하곤 돌아섰습니다.




순간 무안해서 얼른 지나쳤지만 잠시 후 우리 입에선 동시에 같은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니 룸살롱 판촉물이면 여자들한텐 못주나? 참!" 생각하니 당황, 아니 황당했던 것이지요. 어차피 그 부채를 집에 가져갈 것도 아니고 들고 다니다 어딘가에 놓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남자들이 자연스럽게 볼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온갖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부채를 나눠주던 여성들은 그 룸살롱의 종업원일까 아니면 단순한 판촉도우미일까" "전같으면 기껏 자동차에 전단지를 끼워놓거나 남자 웨이터들이 라이터와 휴지 껌 등을 나눠주는 식으로 하던 술집 판촉을 여자들까지 나서게 된 배경은 뭘까" "저렇게 하면 과연 손님이 늘까" 등.




여성들이 룸살롱이나 나이트클럽 판촉에 나선 걸 그날 처음 대한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사는 일산에서 가끔 러시아 여성을 비롯한 웨이트리스들이 가슴에 나이트클럽 띠를 두르고 줄지어 다니니까요. 그걸 볼 때마다 "어쩜, 용감하다. 기왕 하는 일이니 씩씩하게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마음과 함께 "우리 사회가 정말 많이 변했다" 싶곤 했습니다.




나이트클럽 종업원도 엄연히 직업이고 따라서 여자종업원이 판촉행사에 나선 걸 색다르게 보는 것 자체가 편견일 수 있겠지만 얼마 전만 해도 통념상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니까요.하지만 그날의 경험은 잊혀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물론 룸살롱 판촉물을 달라고 한 우리 쪽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당황했지만 그쪽에선 또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언젠가 프랑스 파리 여행중 호기심 많은 한 여기자의 주도로 볼로냐숲(거리의 여자들이 서 있는)에 간 적이 있습니다. 차가 가까이 가자 그들이 다가왔다 안에 여자들이 타고 있는 걸 보자 삿대질을 했습니다. 자기들이 구경거리가 된 걸 알고 화가 난 것이지요.




경우가 다르지만 그 판촉원들도 기분이 나빴을 수 있었을 겁니다. 달라고 한 사람은 다 주는 건줄 알았던 것이지만 주는 쪽에선 놀리는 것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렇더라도 부채를 썩 내밀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으면 훨씬 당당하게 보였을 텐데"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런 와중에 들려온 소식이 있습니다. 일산의 북쪽 다운타운인 주엽역(그랜드백화점 앞)에서 요즘 어떤 아주머니가 사과 시식 마케팅을 한다는 겁니다. 지하철역에서 바삐 올라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요즘 나온 아오리사과를 깎아 건네준다는 얘기입니다.




가깝게 지내는 분의 말씀인즉 얼마나 열심히 건네주는지 안받을 수가 없더란 겁니다. 그래서 받아 먹었더니 맛있어서 되돌아가서 사과를 한 봉지 샀는데 다른사람들도 많이 사더라며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안사겠느냐.나이도 많지 않은 여성이 그렇게 씩씩하고 건강하게 사는데 정말 놀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있던 저도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백화점이나 할인점 슈퍼도 아닌 지하철 역에서의 시식행사라니요. 그것도 혼자 그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말입니다. 사과를 팔기 위해 지하철역 이용객들에게 시식을 시켜볼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도 기막힌데 그것을 실천하는 용기는 더더욱 감탄스러웠습니다. 문득 제 생활도 돌아보게 됐지요.




쥐꼬리만한 자존심을 핑계로 시도도 안해보고 지레 포기한 적은 없었는지, 노력 없이 세상 탓만 한 건 아닌지, 생각만 많고 실천은 안한 건 아닌지, 나이를 내세워 뒷줄에 서서 누군가 챙겨주기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닌지 등. 어느 것 한가지가 아닌 모두가 복합돼 제자리도 아닌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끄러웠습니다.




같은 판촉이고 둘 다 여성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하나는 곱게 차려입고 남성을 대상으로 하고, 하나는 부지런히 남녀노소 모두를 겨냥해 한다는 게 다를까요.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쁘고는 단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수입이 많고 적은지는 따져볼 수 있겠지요. 사과 파는 아줌마는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더랍니다.




그렇겠지요. 두 가지 모두 가만히 있어도 장사가 잘 되면 무엇 때문에 나서서 고생을 하겠습니까. 거리에서 룸살롱 판촉을 하는 젊은 여성들의 용기도 대단하지만, 저는 지하철역에서 사과 시식을 통한 판촉을 벌이는 그 아주머니의 뛰어난 마케팅 정신과 행동력에 훨씬 많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 아주머니는 멀지 않아 자기 과일가게를 갖게 되지 않을까요. 그때는 또 어떤 아이디어를 낼른지요.




나이에 대한 초조감, 오래 해온 일이 좀체 숙달되지 않는데서 오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그러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해도 자꾸 이것저것 핑계를 대게 되는 요즈음, 룸살롱 판촉도우미와 지하철역 사과장수 아줌마의 모습과 태도는 제게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게 했습니다.




"다시 살아 봐야지, 무슨 일이고 할 거면 쭈볏거리거나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고, 있는 힘껏 눈치보지 말고 열심히 해야지"하는 결심을 다지게 했구요. 뭔가 결실을 맺으려면 이 각오가 작심삼일이 되지 않아야겠지요??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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