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만든 우리집 실화

입력 2011-06-21 03:12 수정 2011-06-23 01:56
전쟁은 인류가 만들어 낸 것 중 가장 비극적인 것이다. 아니 인간이 행하는 것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들은 전쟁을 벌인다. 비극적인 결과를 예상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참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어리석은 존재가 인간이다. 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도시는 파괴되며, 자연은 화마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부모를 잃고 울부짖는 전쟁고아를 양산해 낸다. 한반도에서도 61년 전 수백만 명의 젊은이가 전쟁을 왜하는 지에 대한 명분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죽어갔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젊은 영혼들은 빗발치는 총알 맞으며 앞으로 전진해야만 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된 전쟁이다. 휴전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종전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남북군사분계선을 불법으로 남침한 북한에 의해 시작된 전쟁은 무려 3년 이상 지속되었고 그 기간 동안 한반도에서는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투병을 파병한 UN 16개국의 젊은이도 죽어갔다. 미군 병사 약 3만 7천명이 우리 땅에서 목숨을 잃었고, 남아공, 터키, 필리핀, 태국,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등에서 온 병사들도 이 땅에서 귀중한 목숨을 바쳤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던 우리를 도와준 나라를 잊어서는 안 되고 그들이 어려울 때 우리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휴전 상태인 한국전쟁이 재발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되겠다.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순국 선열들의 묘비






매년 현충일 일주일 전에 난 아버지와 함께 동작동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에 간다. 나의 큰아버지께서 안장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큰아버지의 존함은 정홍근이다. 내 아버지의 형님이시기도 하다. 큰아버지께서는 1951년 2월 12일 강원도 평창지구에서 전사하셨다.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7개월여 만의 비극이었다. 그분이 차디찬 한 겨울에 강원도 평창에서 어떻게 싸우다가 돌아가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8살의 청년이 총이나 제대로 쏠 줄 알았을 까라는 의구심과 더불어 군인으로서 지급받아야할 최소한의 장비라도 갖추었을 까라는 상상을 해볼 뿐이다. 2003년에 개봉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며 당신께서 돌아가신 상황을 간접적으로 그려볼 뿐이다. 1950년 큰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경신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아버지는 중학생이셨다고 한다. 한국전쟁은 아름다운 꿈을 간직했을 것만 같은 한 젊은 생명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나의 큰아버지 육군 이병 정홍근의 묘비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원입대한 큰아들이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않자 할머니를 포함한 온 가족은 불안해했고 만약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찾기를 간절히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기도도 물거품이 되고 전쟁에 나간 큰아버지의 소식은 더 이상 없었다.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가족들이 워낙 많은 상황이었고, 통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편지 밖에 없었던 때였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 전사 했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지 61년이 지난 지금도 시신조차 찾지 못한 가정이 많은 것은 그 당시의 참상을 잘 말해준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열강의 대립이 만들어 내고, 어리석은 인간이 빚어낸 전쟁은 몇 년 동안이었지만 그 고통은 두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이 지구상 어디에선가 전쟁의 포성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할 뿐이다.



 





 
묘비의 뒷면에 큰아버지가 전사한 날짜와 장소가 쓰여있다.




한국 전쟁이 휴전되고 몇 십 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한국 정부는 전사자에 대한 정보를 전산화하기에 이르렀다. 전사자에 대한 전산화 작업이 실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1987년에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국립현충원을 찾아갔던 가족들은 정말 쓰러질 것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강원도 평창지구에서 1951년 2월 12일에 전사한 정홍근 이병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던 묘비를 수십 년간 찾아 헤매었단 말인가. 전쟁 중 실종된 것으로 알고 있었던 아들의 묘비를 찾아간 할머니(2005년 작고)는 그 앞에서 하루 종일 오열하셨다. 그리고는 한 달 내내 국립묘지로 오셨고 아들의 묘비석을 어루만지셨다. 수십 년간 가족들의 돌봄도 없이 외롭게 묘지 한 귀퉁이를 지키고 서있었던 묘비석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온다. 영화보다 더 슬프고 마음 아픈 장면의 주인공이 할머니셨고 우리 가족이었다.

  





 
큰아버지의 묘비 앞에 앉아 계시는 아버지



                           

지금도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유골을 발굴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우리 가족은 그나마 축복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유골조차 찾지 못한 가족들에게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전쟁으로 유복자로 태어난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전쟁고아가 되어 거리를 떠돌다 미군의 눈에 띄어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얼마나 되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이산가족 문제도 전쟁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너무 많다. 전사자에 대한 국가적인 예우와 보상 문제도 아직 많은 숙제를 안고 있으며, 살아있지만 치명적인 상처로 아직도 병원에 입원해있는 사람들의 문제도 있다. 우리가 당한 전쟁의 교훈을 후세에 알리고 교육시키는 것도 중요한 것 중의 하나다.



  





 
전사한 장소와 날짜가 없는 묘비도 많이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이미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78세의 노인이 되셨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한국 전쟁 직후에 태어난 사람들조차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은퇴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18살의 피 끓는 젊은이가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원입대하여 강원도 평창까지 가서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는 것이다. 난 보지도 못한 큰아버지이지만 당신이 지녔던 애국심 넘치는 숭고한 열정에 감동 받는다. 그리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동기를 부여 받는다. 죽은 자는 더 이상 말이 없지만 말없는 죽은 자 앞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더 많은 메시지를 받는다.

 

 



 
올해 78세가 되신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묘비 앞에서



 

우리에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휴전 상태로 61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천안함 폭침으로 우리의 해군 병사들이 죽었고,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또 다시 이 땅의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 점점 흐려져 가는 안보의식 속에서 매년 현충일 즈음에 방문하는 국립현충원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젊은 피를 한반도에 뿌린 나의 큰아버지 육군이병 정홍근의 영혼이 조국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다. 큰 아버지에게 꽃을 바쳤다. 그리고 술 한 잔을 올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 큰아버지 당신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존경 합니다. 당신이 목숨과 바꾼 이 나라를 살아남은 우리가 더 좋은 모습으로 만들겠습니다. " 라고.

- 이 글은 6월 6일 교과부 블로그에 기고한 본인의 글입니다.

숭실대학교 글로벌통상학과에서 국제통상협상론과 무역경영론을 가르치고 있다. 해외파견 근무 및 55개국 300여개 도시를 여행한 경험을 토대로 글로벌 문화에 대한 글을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으며 한류산업과 다문화시대의 협상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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