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은행나무의 힘

입력 2002-12-20 15:49 수정 2002-12-20 15:49
//어느 새 한해가 훌쩍 지나갔습니다. "올해엔 꼭!" 하던 일중 한가지도 이루지 못한 채 해를 넘기게 됐습니다. 안타깝지만 새해를 기약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듯합니다. 이런 참에 "아직 인생의 `쓴 맛`밖에 못본 과객"이라는 자기 소개 메일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조직의 쓴맛을 수없이 절감한 만큼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 지 난감했습니다.




//문득 경기도 양평에 있는 용문사의 `은행나무`가 떠올랐습니다. 지난 여름 휴가 때 가족들과 함께 보면서 놀라웠던 기억이 살아난 것이지요.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년)에 대경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진덕여왕 3년(649년)에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있는 데 보통 전자가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용문사가 유명한 건 절 건물 바로 아래 우뚝 솟은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 덕입니다. 절 입구인 일주문에서 소나무 우거진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거목이지요.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됐다는 이 나무에 대해선 얽힌 사연도 많습니다.




태생부터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625∼702)가 던져 놓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고 하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심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마의태자 쪽을 기준 삼아 1천1백살 정도 됐다는 게 통설이지요. 오래 살아온 만큼 신비하고 기이한 일화도 많습니다.




정미사변 때 왜군이 쳐들어와 절을 불태웠을 때도 타지 않았고, 고종황제가 승하하셨을 때는 큰 가지가 뚝 부러졌고, 일제 때 나무를 자르려던 순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8.15광복과 6.25, 4.19와 5.16 등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면 미리 알고 울었다고도 하구요.




///어쨌거나 문화재청에서 최근 전국의 노거수(老巨樹·늙고 오래된 나무) 1백40건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키는 67m, 지면에서의 줄기 둘레는 15.2m로 여전히 국내 식물중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62년 12월3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때 60m였다고 하니까 그동안 7m나 더 자란 셈이지요.




1천살이 훨씬 넘었는데도 계속 잘 생장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해마다 열다섯 가마나 되는 은행을 딸 수 있다고도 하구요. 제가 봤을 때도 정말이지 나이든 느낌이라곤 없었습니다. 이 나무의 절반 나이밖에 안되는(그래도 6백살이긴 하지만) 절 앞마당 `주목`이 살가죽만 남은 노인같은 형색을 하고 있는데 반해 이 은행나무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요.




//더러 부러진 가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낡고 오래 돼서 죽음의 빛이 스민 것들이 주는, 여위고 앙상하고 물기없이 축 처진 느낌이 전혀 없이 당당하고 활기차기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랜 풍상 속에 자신을 지켜온 나무답게 뭐라고 간단히 형용할 수 없는 단단함과 위엄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물론 은행나무는 세상이 온통 공룡들로 가득찼던 백악기 이전의 나무로 같은 시대 생물중 거의 유일하게 살아 남은 장수식물입니다. 은행나무에서 혈액순환 촉진제가 개발된 것도 이토록 강한 생명력을 유지시킨 비결을 연구해온 데서 비롯된 것이지요.




///다시 한해를 보내는 즈음 `용문사 은행나무`를 새삼 떠올린 것은 새해엔 나이나 처지에 아랑곳 없이 꿋꿋한 그 나무를 조금이나마 닮을 수 있었으면 싶어서입니다.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제 자리에서 온유하되 강건한 모습으로 묵묵히 제 몫을 잘 감당했으면, 그럼으로써 나이듦에서 비롯되는 괜한 주눅이나 눈치보기, 기웃거리기, 지레 포기하기.....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 의연한 자세를 지닐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지요.




개인별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들면서 자신감을 잃습니다. 나이가 주는 크고 작은 제약에 스스로 기가 죽는 것이지요. 전같으면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여겼던 많은 일들을 타의에 의해 혹은 "이 나이에 뭘" 하는 생각 때문에 포기하는 수가 많습니다. 의욕이나 열심, 부지런함도 당연히 줄어들기 십상이지요.




살아있는 존재의 특성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합니다. 욕망이 고통을 만들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결국 나이 들어 욕망을 줄이는 건 고통을 없애기 위한 방편일 테지요. 그러나 고통이 없으면 삶도 없다고 합니다.




///모든 동물 아니 식물까지도 생에 대한 뚜렷한 동기가 있으면 평균수명보다 훨씬 오래 산다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사람의 경우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5년은 젊어진다는 얘기도 있구요. 게다가 동기가 확실하고 강렬하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성취도는 물론 성취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훨씬 단축된다고 보고돼 있습니다. 동기는 꿈과 광기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도 하구요.




나이 들면 자꾸 막막해집니다. 막막함은 두려움의 또다른 형태라는데 말입니다. 정리한다는 구실로 자꾸 도망가고 싶어지기도 하구요. 이럴 때 용문사에 한번 다녀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잎을 다 떨군 나목 상태로도 변함없이 우람한 모습으로 서있을 은행나무를 보면서 세월과 더불어 자꾸 초라해지는 자신을 추스르고, 새해엔 미처 못한 일들을 보다 열심히 마무리하자고 다짐해 보면 "인생의 쓴맛" 때문에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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