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과 만리장성& 이화원

입력 2002-09-30 09:36 수정 2002-09-30 09:36
잠시 중국에 다녀 왔습니다. 북경에서 `자금성`과 `만리장성` `명13릉` `이화원` 등을 둘러보고, 비행기로 3시간 30분 날아간 운남성 곤명에서 `용문석굴`을 구경했습니다.




천안문 광장을 거쳐 `자금성` 앞에 다다랐을 때 너무 이상했습니다. 나무 한그루 없이 썰렁한 돌바닥 앞에 횡뎅그레 높은 담으로 둘러 쳐진 궁궐문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첫 번째 문을 지나 두 번째, 세 번째 문을 지났을 때도 나무는커녕 풀 한포기 볼 수 없었습니다. 궁궐이라면 활엽수와 침엽수가 알맞게 배치된 정갈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연상하던 저로선 의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금성의 규모에 감탄하고 "자금성을 본 사람들이 우리 나라 경복궁이나 덕수궁을 보면 궁궐같기나 하겠느냐"고 말하지만 저는 "글쎄" 싶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살아있는 식물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돌바닥과 건물만 있는 궁궐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없으면 생명도 계절도 느끼기 어려우니까요.




제아무리 황금의자에 앉아 보석으로 치장하고 산해진미를 먹는다고 해도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이슬과 바람소리를 내는 나뭇잎과 촉촉이 젖어 부드러운 땅을 느낄 수 없는, 딱딱한 돌덩이와 출구라곤 없이 사방이 건물로 가로막힌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건 어렵지 않았을까요. "아이구, 이런 데서 살다간 멀쩡한 사람도 미치겠다" 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가"고 물었더니 "자객이 나무를 타고 들어올까 봐 있던 나무도 모두 베어버리고 땅 속을 파고 들까 봐 땅 속 깊이 벽돌을 층층이 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더군요. 그제서야 자금성을 만든 게 명나라(1368-1644) `영락제`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영락제는 명나라의 3대 황제입니다. 명 태조 주원장(홍무제)의 손자인 혜조가 친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들자 연왕이었던 그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된 것이지요. 그는 1403년 황제가 된 다음해인 1404년부터 무려 20년에 걸쳐 자금성을 짓습니다. 북경으로 천도한 건 궁궐이 거의 완성된 1421년이지요.




반란으로 황제가 된 까닭일까요. 그는 땅 위와 땅 아래 어디로도 자객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웠던 모양입니다. 살아서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누군가 자신을 해칠 게 무서웠는지 생전에 지하20여m 아래 또하나의 궁궐같은 무덤을 만들고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을 몽땅 죽여버렸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만들기 시작한 게 `만리장성`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들르게 되는 `명 13릉`입니다. 영락제를 포함한 13명 황제의 무덤이지요. `만리장성`의 대대적인 보강에 들어간 것도 바로 영락제구요. 반란을 일으킨 자로서 또다른 반란에 대한 끝없는 공포 속에 살다 죽어간 셈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자금성과 명13릉의 규모에 놀라기보다 인간의 덧없는 욕망과 허망함에 한없이 서글퍼 졌습니다.




북경에서 마지막으로 갔던 `이화원`은 그같은 느낌을 한층 더 강하게 했습니다. 이화원은 산과 강을 볼 수 없는 북경에서 인공으로 호수(곤명호)를 파고 거기서 나온 흙으로 인공산(만수산)을 만들어 꾸민 정원입니다. 명나라 중엽에 작게 조성됐던 걸 청나라 건륭제 때 증축하고 유명한 서태후(1835-1908)가 별궁으로 썼다는 곳이지요.




호수와 산 사이에 만들어진 긴 낭하(지붕은 있고 양 옆은 트인)가 유명한데 서태후가 비오는 날 혼자 거닐던 곳이라고 하는 군요. 벽과 기둥은 삼국지와 수호지의 내용을 옮긴 온갖 그림으로 장식돼 있습니다.




서태후는 1894년 회갑 축하연을 위해 이화원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는데 이 비용으로 해군 증강을 위해 영국에서 빌린 돈까지 갖다 썼다고 합니다. 믿기 어렵지만 하루 한끼 식사 준비에 중국 일반서민 1만명분의 돈이 들어갔다고 하니까 그 정도쯤은 아무 일 아닐 수도 있었을른지요. 그것도 먹지 않고 처음엔 냄새만 맡고 다음엔 보기만 해도 물린 다음(음식의 냄새와 모양에 질리도록 하기 위해) 실제론 조금 먹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서태후에 얽힌 얘기는 이밖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어린 아들(동치제)을 죽이고 조카(광서제)를 즉위시켰다 개혁파와 손잡자 자금성 가운데 유폐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이 죽기 전에 죽였다는 것 등.실제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 세상을 떠났습니다.




과연 그 많은 얘기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조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온갖 욕망의 화신으로 여기고 있는 건 틀림없는 듯하니까요. 그러나 그 숱한 얘기들 가운데는 청나라 패망의 책임을 몽땅 덮어 씌우려는 이들의 과장도 작용한 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없지 않습니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지탱하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웠을 진대 이전의 엉망진창이던 황제들의 소행은 묻히고 서태후의 패악만 유독 두드러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도 서태후의 잘못이 상쇄될 수는 없겠지요. 정치적 역학관계가 작용했다고 해도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허욕쟁이고 인륜에 어긋난 짓을 한 것도 분명해 보이니까요. 누군가 우스개소리로 이러더군요. "자금성이나 이화원도 짓고 무덤 만드는 데도 이렇게 엄청난 돈과 인력을 들이는데 그까짓 집 고치는데 30억쯤 쓴다고 뭘 그리 야단들이냐구요"




아무튼 이번 중국 여행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특히 권력의 무상함을 절감하게 했지요. 반란과 자객, 외적의 침입을 그토록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 청나라 모두 3백년을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두 왕조 모두 2백76년을 버틴 데 불과했으니까요. 황제의 안녕을 위해 아무리 기를 써도 백성의 괴로움을 나몰라라 하고선 결코 오래 갈 수 없다는 걸 입증하고 있다고나 할른지요.




한가지 덧붙이면 북경의 도심은 화려했습니다. 땅이 넓은 탓인지 우리처럼 사각형 일색이지 않고 제각각 조형미를 살려 지은 건물은 아름다웠구요. 그러나 가로수가 없거나 수종이 볼품 없어 도시는 건조하고 황량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어디를 돌아봐도 푸른색으로 가득한 서울은 정말 훌륭한 도시다 싶었습니다. 도시란 건물만 갖고 이뤄지는 게 아님을 새삼 깨달은 셈입니다. 어느 틈에 가로수와 사방 산들의 색깔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 가을 가까운 이들 혹은 오래 못만난 이들과 산길에서 만나보는 것도 정말 좋을 듯합니다만....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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