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소리

입력 2013-08-12 10:00 수정 2013-09-29 04:05






고구마순이 시장에 나오는 것을 보니 가을이 가까이에 와 있구나 싶습니다.
5월 중순경에 이식한 고구마모종이 착근하여 줄기가 마구 뻗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땅벌이가 숱해’, 유년에 어머니가 텃밭에 가득한 고구마순을 보고 하시던 말씀입니다.

높여놓은 두둑에 고구마모종을 꽂아놓고 착근을 기다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순들이 자라 뻗어나는 넝쿨로 고구마밭은 호랑이가 새끼 칠만큼 무성해졌습니다. 줄기 보다는 뿌리로 가야 할 양양 공급을 원활하게 해주려면 줄기에 돋은 전뿌리들이 착근하지 못하도록 수시로 들어주고 거기에 달린 순들을 따 주어야 뿌리로 양분이 축적돼 밑이 드는 것이지요.

입추가 지났지요?
폭우와 폭염으로 쉴 새 없었던 이 여름도 이제는 물러갈 채비를 하는 모양입니다. 아침부터 푹푹 찌던 폭염은 심야를 지나면서 차츰 가라앉다가 새벽녘이면 서늘한 기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옵니다. 허접함에 자리에서 일어나 홑이불이라도 끌어당겨야 잠을 이룰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거짓말 같은 변화는 입추가 지나면서부터 나타난 징후입니다.

햇고추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엔 비가 많이 와서 고추가 해를 입을까 염려했었는데 작황이 좋습니다. 최근의 폭염은 건조에도 좋아 빛깔 고운 태양초들이 많이 나오고 있네요.
햇고추를 믹서에 갈아 얼갈이김치를 담갔습니다.

여름이면 떠오르는 반찬 1호가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풋김치입니다. 여름철에 담그는 김치는 포기배추 보다 얼갈이나 열무로 담근 풋김치가 제격입니다. 김치 담근다는 낌새만 보이면 어느새 식구들은 확독가로 빙 둘러 섭니다. 건고추, 마늘, 밥, 생강 두 톨, 생멸치젓을 넣고 절구대로 휙휙 갈아 걸죽한 양념이 만들어지면 간해놓은 얼갈이배추를 넣고 버무리다 마지막에 통깨를 듬뿍 뿌리면 생김치는 완성입니다.

식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왼 손엔 찬밥덩이를 쥐고, 오른 손으론 생김치를 집어 밥 위에 걸쳐 정신없이 먹어댑니다. 캡사이신과 마늘, 생강에서 나오는 각각의 매운맛과 향, 추자멸치젓의 곰삭은 맛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남도김치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유년의 여름날에 먹었던 그 김치의 맛은 제 기억 속에 살아 남이 있는 미각의 원체험입니다.

올 여름은 날씨 변덕도 심해 땡볕이 내리 쬐다가도 금세 먹구름이 몰려 와 장대비를 퍼부었으니 정신을 차리고 지내기가 어려웠지요. 아직은 노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어올 양이면 그게 어찌나 고맙고 상큼한지요.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문득 유년에 부르던 동요 한 구절이 실감 나는 순간입니다.

뜯어 온 고구마 순이 마르기 전에 껍질을 벗겨 냅니다. 이열치열, 가만이 앉아 있기도 버거운 이 염천에 고구마순을 벗기다 보면 손톱밑은 금세 까매지고 진력이 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그만 버리고 말아' 싶다가도 따 온 공력이 아까워 마지막 하나 남은 것까지 다 벗겨 냅니다. 재료를 맑은 물에 씻은 후, 소금 약간을 넣고 물을 끓여 삶습니다. 다른 야채들은 살짝 데쳐내야 맛과 태깔이 살아나지만 고구마순은 육질이 단단해서 푹 무르게 삶아야 먹기에 좋습니다.

보기는 시원찮아 보여도 고구마순을 손질하여 찬으로 만들면 그게 밥도둑입니다. 간장과 들깨가루에 볶아도, 갈치조림 할 때 무 밑에 깔아도 흐물흐물 무른 게 여간한 맛이 아니지요. 저는 오늘 어머니가 해주시던 대로  된장초무침을 만들었습니다.

삶은 고구마순의 물기를 꼭 짜버리고 되직하게 만들어놓은 초고추장에 다진 마늘과 된장 조금 넣고 버무립니다. 새콤하면서 달달한 고구마순초무침이 달아난 입맛을 산듯하게 돋워 줍니다. 뜨끈한 밥 한 공기에 노각무침 한 접시와 갈치조림, 얼갈이김치, 그리고 고구마순된장초무침으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갈치조림은 제가 한참 기다리고 있던 메뉴인데 낚시를 마치고 돌아오던 아이들이 마련해와 불현듯 만든 음식입니다. 수일 전부터 목포먹갈치 값이 좀 내리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는데 언제 그걸 눈치 챘는지 아이들은 마트에서 제주 은갈치를 사들고 와서 부지런히 요리를 합니다. 제주 은갈치는 육질이 단단하고 맛이 담백해서 조림으로 좋고 , 목포 먹갈치는 살이 부드럽고 고소해서 구이용으로 알맞습니다.

건새우와 도톰하게 썬 무에 물과 고춧가루, 설탕 반 숫갈, 간장을 넣고 무가 거의 무를 때까지 끓입니다. 준비해놓은 갈치, 양파, 청양고추편, 대파채, 다진마늘에 고추장을 넣고 갠 양념장을 부재료 켜켜이 끼얹고 센불에 졸이다 마지막 약불에 10여 분 뜸을 들이면 완성입니다.

비는 퍼붓고 번개는 번쩍이고 벼락 치는 소리 요란한데 얘들이 사온 부식으로 저녁을 마치니 요게 사는 즐거움이고 행복이지 싶습니다. 나이가 드니 단순한 삶이 좋아지고 즐거운 시간은 스스로 만들며 사는 게 지혜다 싶습니다.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행복, 그것 기대하다가는 평생 불퉁거리다가 세월 다 가버리게 생겼으니까요.






                  <관곡지의 연 요리경연대회에서  조리 과학고등학교학생들이 출품한 편수>




* 주말에 가 보시면 좋은 곳, 다시 소개해 올립니다.

인사동의 가나아트센터에서 전통공예 페스티벌(8월 14일부터 18일까지)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 공예품과 규방공예 작품들을 구경해 보세요.
자세한 사항은 아래 주소를 열어 보세요.

http://cafe.naver.com/ssamzisarang/46726

*규방공예
규방공예란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극히 제한적이던 조선시대에 양가의 규수들이 규방에서 손끝으로 한땀한땀 바느질로 수예품울 만들어 내던 데서 비롯된 공예 장르입니다. 조각보 주머니, 가리게, 옥사다포 등의 수공예품에 여인들의 내면 풍경을 담아 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규방공예를 일러 '손끝으로 피워내는 꽃'이라 표현하기도 합답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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