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복(淸福)

입력 2011-10-30 14:44 수정 2012-06-13 04:19
가을이 깊어가니 잎새들은 저마다의 빛깔로 변하여 한 해의 삶을 마감하려 합니다.
강수량이 줄어 대지가 건조하고 기온도 낮아져 뿌리로부터 잎으로 빨아올리는 수분량이 적습니다. 나무의 이파리에는 푸른색을 띠는 엽록소 이외에 붉은색의 카로틴, 노란색의 키산토필이 들어 있습니다. 여름에는 이들이 엽록소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다가 수분 공급이 잦아드는 가을엔 엽록소가 햇볕에 의해 파괴됩니다. 대신 가려져 있던 카로틴과 키산토필이 나타나 노랗고 붉은 단풍으로 변합니다.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현상은 잎을 희생시켜 모자라는 수분을 적절히 유지하려는 나무의 생존법입니다. 이렇듯 나무는 자신의 결핍을 약탈이 아닌 자체조달로 해결하는 미덕을 지녔습니다.

관전의 재미가 쏠쏠했던 서울시장 선거 이후, 무심했던 정치판으로 다시 눈길이 갑니다.
정치는 다양한 이익집단의 요구를 효율적으로 조절해나가야 하는 고도로 복잡다기한 현장입니다. 산재한 현안들을 풀어나가야 하고, 불의의 재난에도 신속하게 대응하여 처리해야 하며, 시민들의 고통을 경청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등, 처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습니다. 새 지도자 한 사람의 등장으로 살만한 도시가 당장 만들어지진 않겠지만, 다시 변화에의 기대를 품을 수 있어 숨이 트입니다. 

사회든 개인이든 속성이 바뀌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익히 경험한 바이지만 그래도 '이번 만큼은' 예외이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산등성이에 허옇게 나부끼는 억새와 수확이 끝나버린 들판에 남겨진 짚뭉치가 그래서 쓸쓸하지 않습니다. 아직 생기를 머금고 있는 보랏빛의 들국화와 노오란 산국이 길손을 반기는 가을산을 오를 수 있는 기쁨도 이즈음에 누리는 청복입니다. 

먼 데서 사는 친구가 고향을 찾아들어 만나게 되니 깜짝 반갑습니다.
모두 노구를 지탱하시기에 버거운 부모님을 뵈러 이것 저것 다 접어두고 찾은 친정길입니다. '어야, 우리 아프지 말고 늙세' 마음 대로 다짐들을 하며 소리내어 웃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살면서 겪게 되는 인간의 야만성에 절망하고, 그 절망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가야만 하는 속절없음에 주눅들다가도, 그리운 친구와 함께하는 순간 만큼은 기가 펄펄 살아 퍼득입니다. 굳이 말이 없어도 눈빛 만으로 온기를 나누며 간절하게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는 지기를 만나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요.

세상은 자신의 이(利)를 위해 상대방 흠집내기를 서슴치 않고, 계산된 머리 굴리기로 알뜰살뜰 제 몫을 챙기려는 고수들로 넘쳐나니, 삶은 어쩌면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훈련의 연속 같기도 합니다. 치유를 위한 몸짓으로 잠시 구원에의 꿈을 꾸어도 보지만 특정 신앙에 자신을 가두느니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도모해가는 쪽으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마음이 기진할 때 찾는 그림이나 숲, 그리고 문학 작품은 지친 영혼을 달래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온 몸으로 부등켜 안고 고뇌하는 작가, 김훈 선생님의 <黑山>을 읽습니다. 죽어서 구원의 삶을 증거하든 배교로 치욕을 감당하며 이승의 삶을 이어나가든 그것은 옳고 그름이 아닌 선택의 문제라는 게 작가의 시선인 듯합니다.

간결하나 묵직한 武士的 문장 속에 조선 후기 서학(천주교)에 관련됐던 정 씨 집안(다산 정약용)의 4 형제 중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을 축으로 한 형제들과 조카 사위인 황사영 등, 피폐한 시대를 사는 지식인들의 아득한 꿈과 좌절, 그리고 민초들의 핍진한 삶의 모습들이 어제런듯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생명에 대한 존엄과 연민이 떠나버린 자리에 똬리를 튼, 인간의 야만성에 진저리쳐 책장을 덮었다 다시 펴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더듬더듬 읽었습니다. 온통 아수라장일 뿐인 당대의 풍경 속에서도 언듯언듯 내비치는 햇살처럼, 황사영과 명련의 사랑이 눈물겹습니다.

작가는 한사코 문학이 밥벌이에 지나지 않은 일이라며 가볍게 규정해버리지만, 그러한 선생의 겸사에 동의할 평자나 독자가 얼마나 될까요. <흑산>을 쓰는 동안 선감도의 작업실에서 6개월 동안이나 칩거하며 소설작업과 맞닥드려야 했고 ,< 칼의 노래>를 집필하는 동안 남평의 농가에서 혹독한 추위와 싸우다 여덟 개의 치아가 빠져나가는 고통까지 감내해야 했습니다.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憂國愛民의 志士情神이 아니고서야 그 혹독한 글쓰기가 어찌 가능할 법이나 한 일일까요. 그 미더움이 작가의 新作이 나올 때마다 이내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합니다. 염치 없는 바람이지만 오래도록 건필하시어 동시대를 사는 독자들에게 누추할지라도 살아 있음이 다행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작년 여름 배추 파동으로 혼줄이 난 때문인지 올 가을은 김장무와 배추가 풍작입니다.
금세 뽑아 온  야채로 차린 무생채와 배추고갱이 쌈이 밥맛을 돋웁니다.
꽃멸치젓으로 만든 쌈장은 밥상에 앉는 즐거움을 더합니다.
탱탱하게 약 오른  끝물고추 썰어넣고 얼큰하게 끓인 시래기된장국에 햅쌀밥 말아 새콤하게 익은 무깍두기 얹어 먹는 재미가 삼삼합니다.
이 모두가 늦가을 휴일에 맛보는 청복이지 싶습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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