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사고가 가져다 준 행복

입력 2002-06-27 09:56 수정 2002-06-27 09:56
살다 보면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을 겪게 됩니다. 자동차 사고도 그중의 하나지요. 저는 최근 에어백이 터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우리차가 앞차를 받았으니 당했다는 표현이 맞는 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불의의 사고임엔 틀림없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건 정말 한순간이었습니다. 길을 잘 몰라 표지판을 찾고 있던 중 갑자기 앞차가 바로 앞에 보이더니 "꽝!" 했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차 안은 에어백이 터지면서 나온 가스 연기와 냄새로 가득차 있었지요. 아니 에어백이 터지면서 나온 연기와 냄새라는 건 나중에 안 것이고 당시엔 금방이라도 차에 불이 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운전하던 애들 아빠와 뒷자리에 탔던 둘째에게 얼른 차에서 내리라고 말하고 저 역시 구두도 못신은 채 내렸지요. 저는 에어백이 터지는 순간의 충격때문인지 입술이 금방 퉁퉁 부어올랐지만 크게 다친 데는 없는 듯했습니다.




다른 식구들도 괜찮다고 해 어느 정도 안심이 됐지만 앞차에 탔던 사람들이 어떤 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차문을 열고 구두를 꺼내 신은 뒤 앞차로 갔더니 다행이 뒷좌석엔 사람이 없고 앞좌석에만 두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상태를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해 일단 보도로 돌아왔지요.




보험회사에 전화를 하는 동안 견인차가 오고 잠시 뒤 경찰도 도착했습니다. 경찰이 어떻게 된 건지를 묻길래 사실대로 얘기했더니 보험은 들어놨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종합보험에 가입했다고 대답했더니 그럼 됐다며 피해 차량에 사고 접수번호를 알려준 뒤 집으로 가도 좋다고 했습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입술이 오리주둥이처럼 부어오른 것만 빼고 멀쩡한 듯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턱과 손등, 무릎 등 여러 곳에 멍이 들고 긁힌 자욱이 있었지만 당시엔 놀라고 당황해서 몰랐던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 식구들은 모두 무사한 듯해 아무도 병원에 가지 않은 채 견뎌냈습니다. 앞차에 탔던 사람들도 며칠 통원치료를 받는 정도로 괜찮아졌다고 했습니다.




차는 수리하는 데 열흘 정도 걸린다고 했습니다. 아주 엉망이었거든요. 앞차는 렌트카를 쓰겠다고 했지만 우리는 그냥 차 없이 지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집 앞에 바로 기차역이 있고 종착역인 서울역에 내리면 저와 애들 아빠 모두 회사까지 걸어서 가도 되는 만큼 기차로 출퇴근하기로 한 것이지요.




처음 일산으로 이사했을 때는 곧잘 기차를 이용했습니다. 95년 서울역에서 일산역까지 기차요금은 2백50원이었습니다. 홍익회 회원들이 다니며 "사이다 콜라 있어요, 김밥도 있습니다"를 외치기도 하던 시절이지요. 얼마 있더니 3백원으로 오르고 곧 4백원이 되더니 어느날 갑자기 1천원이 됐습니다. 지금은 1천1백원입니다. 물론 그 사이에 대곡과 행신 등 새로운 역이 생기기도 했지요.




기차를 타지 않게 된 건 공사를 한다며 서울역까지 운행하지 않고 신촌까지만 왔다갔다 하면서부터였습니다. 다시 서울역까지 다닌다는 걸 알았지만 습관상 계속 차를 탔던 거지요.




오랜만에 타본 기차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예전같으면 꼴찌로 타도 충분히 앉을 자리가 있었는데 줄 맨 앞자리에 섰다 열심히 올라가도 가까스로 자리를 차지할 만큼 사람이 많아진 겁니다. 일산 근처에 새 아파트가 워낙 늘어난 까닭이지요.




그래도 비둘기호에서 통일호가 된 뒤 에어컨을 설치해 시원했고, 창밖의 풍경은 아름다웠습니다. 논과 밭이 절반 이상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논은 모내기를 막 끝낸 뒤의 푸르름과 찰랑거림으로 눈부셨습니다. 햇빛에 반짝이는 논물의 황홀함을 알게 된 건 재작년부터입니다. 여린 모 사이로 조그맣게 일렁이는 논물이 어쩌면 그리도 어여쁘던지요.




시골역들 역시 옛풍경 그대로여서 정겨웠습니다. 일산 백마 능곡 화전 강매 등 예부터 있던 역엔 지금 접시꽃과 잠자리꽃이 한창입니다. 신촌역까지두요. 접시꽃은 다른 데서도 간혹 볼 수 있지만 잠자리꽃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데 아파트촌 한가운데 있는 기차역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겁니다. 영화 `약속`에서처럼 화분대에 작은 꽃화분이 총총 놓여있기도 하구요.




자동차 사고가 가져다 준 행복은 또 있었습니다. 작은 녀석의 생일을 맞아 일산의 카페촌인 애니골(보통 화사랑 골목이라고도 부릅니다)에 있는 식당에 갔던 날이었지요. 갈 때는 택시를 타고 갔습니다만(택시비가 5천원 가까이 나오는 거리입니다) 돌아올 땐 택시 잡기도 어려우니 일단 큰길까진 슬슬 걸어가보기로 했지요. 큰길까지 나온 다음 우리는 다시 기차길을 따라서 만들어진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가다가 힘들면 택시를 타자는 조건을 붙여서 말입니다.




그동안 마음속으로 "온 식구가 저 길로 산책하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번도 해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날 실천하게 된 것이지요. 서로 다리 아프지 않느냐고 물으면서 걷는 동안 우리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날이 마침 우리 축구팀이 스페인을 꺾고 4강에 오르던 날이어서 시내는 온통 정신없이 시끄러웠는데도 그 길은 한적하기만 해 온 식구가 오손도손 얘기를 나눌 수도 있었지요.




사고 덕분에 7년동안 작정만 하다 말던 `기차길 가족산책`을 하게 됐던 셈입니다. TV를 끄면 대화와 독서 시간이 늘어난다고 하듯, 자동차가 없으면 함께 걸을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는 걸 입증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우리 가족은 이번 일을 계기로 가끔 기차길 옆을 걷기로 했습니다. 자동차를 찾은 뒤에도 날씨가 좋으면 기차로 출퇴근하구요.




물론 차값은 떨어지고 보험료는 오를 테지만, 자동차 사고가 가져다준 작은 행복들은 끔찍하게 오른 강남의 집값 때문에 속 상하고 언짢고 배아프던 마음에 정말이지 "그런 게 뭐 대수인가"라는 `대범함(?)`을 가져다 줬습니다.




금방 잊혀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현재의 삶과 자꾸만 강팍해지는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건 큰 축복이다 싶어 기뻤습니다.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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