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입력 2010-05-13 10:32 수정 2012-05-25 05:52


 


    장욱진 화백의 그림.1951. 자화상(보리밭) 종이에 유채






       5월의 청보리밭. 사진-  지리산 자연밥상 '산춘추' 뜰지기 고영훈 님.

오월의 훈풍에 일렁이는 청보리밭의 모습은 자연의 경이로운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청보리가 패기 시작하여 이젠 알곡으로 영글어가는 시기이네요.
한데 안타까운 것은 올 봄의 일조량이 턱 없이 부족하여 냉해를 많이 입었다는 소식입니다.
냉해를 입으면 죽정이가 많아져 수확량은 크게 줄어드는 것이지요.

지난 시절, 보리 이삭이 막 나오기 시작하는 음력 4월은 보리고개가 정점에 이르는 시기였습니다.
거년에 거둔 곡식은 이미 바닥이 났고 기다리는 보리 수확은 아직 멀었으니 끼니를 끓일 양식거리가 걱정이던 때였지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셔야 했던 조상님들의 고단함은 이제 아련한 추억이 된 지 오래입니다. 느긋해진 마음에 옛 추억을 되살려 보는 여유로움으로 혹은 보리가 건강식이라는 새로운 인식으로 보리밥은 이제 도시인들이 즐겨 찾는 메뉴가 되었습니다.

보리밥과 가장 잘 어울리는 상차림은 바뜩하게 끓인 강된장과 홍고추를 갈아 담근 열무얼갈이김치, 몇 가지의 나물, 아니면 각종 쌈채와 약고추장 그리고 생선조림입니다.
보리밥에 약간의 나물과 강된장, 또는 보리밥에 얼갈이열무김치를 얼기설기 잘라 넣고 약고추장 한 숫갈을 넣어 슥슥 비비면 그 풋풋하고 구수한 맛이라니... 

묵은지의 양념을 털어내고 물에 한 번 헹구어 냄비의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손질한 고등어를 올리고 양념장을 끼얹어 물을 넉넉하게 부은 다음 센 불에 파르르 끓이다가 다시 중불에 뭉근히 조립니다. 배추김치가 아닌 갓김치도 좋아요. 묵은지 고등어조림은 언제 먹어도 입맛 당기는 편안한 밥반찬입니다. 보리밥은 물을 넉넉히 붓고 압력솥에서 뜸을 충분히 들여야 딱딱하지 않아요. 보리밥은 소화가 더디니 식후에 요구르트를 하나 드시면 좋겠지요.
최고의 건강한 식사는 거친 곡물로 지은 밥과 푸성귀로 만든 반찬을 적당히 드시는 것이라 하네요.

조금 있으면 보리 이삭이 누렇게 익어 갈 터인데 황량한 황토 보리밭 사잇길을 어울리지 않은 연미복을 입고 걸어가는 신사의 모습을 그린 장욱진 화백( 충남 연기.1917. 11. 26- 1990. 12. 27)의 그림, <자화상>(일명 보리밭)을 소개합니다. 장욱진 화백의 그림은 지난 12월 10일부터 올 2월 7일까지 서울대학교의 미술관에서 전시된 바 있고 네이버의 오픈캐스트에도 소개 되었다고 합니다.

6.25 전란 중에 그린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내모습'이라고 화가 장욱진은 말합니다. 현실은 참담하지만 어서 전쟁이 끝나 하늘의 뭉개구름 사이로 새들이 날고 강아지가 신나게 뛰노는 새날이 오기를  간절하게 염원하는 그림인 듯싶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유난히 어렵고 고독한 시절이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꼬이고 행운은 늘 자신만을 피해 가는 듯한 암울한 시기 말이지요. 그럴 때 자신을 위로하고 다독여 주는 대상은 친구나 가족일 수도 있지만 하늘, 구름, 신록, 흐르는 강물, 날으는 새나 강아지 같은 대자연이나 예술 작품에서 더 깊은 위안과 평안을 얻기도 합니다. 

정신 없이 돌아가는 일상 중에서도 잠시 짬을 내어 창 밖을 바라보시면, 어느 새 연록은 짙은 녹색으로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말 없는 자연은 저리 소리 없이 성장하고 새롭게 변화해가는데 나는 어찌하여 절망의 늪에 갇혀 허우적거리고만 있는가?'라는 판단이 서면서 '이러는 게 아니지' 라는 자각이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삶의 리스크는 우리 옆에 상존하지만 그걸 이겨 낼 수 있는 힘 또한 우리 안에 내재해 있으니까요.

지금 보리밭의 모습은 아직 청색입니다.
청보리 꺾어 보리피리 만들어 불던 유년의 기억도 떠오르고, 영글어 가는 보리 모가지 꺾어 마른 솔가지에 그슬려 먹던 보리그스름, 보릿가루로 쪄낸 보리개떡도 생각납니다.
보리는 지금 우리와 많이 멀어진 작물이지만 곱씹어볼수록 우리와 아주 친숙했던 먹을거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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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화백의 미술관이 경기도 장흥에 건립 중에 있고, 그가 살았던 고택이 용인에 있습니다.  장욱진 화백의 그림 몇 점은 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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