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발낙지야, 미안해

입력 2009-11-29 08:54 수정 2009-12-05 01:29
비빔밥은 재료가 다 갖추어지지 않아도 언제든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게 매력입니다.
찬밥에 신김치만 있어도 뜨끈한 김치볶음밥으로 조리될 수 있으니까요.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 또한 다양하기 그지 없어서 육물이나 해물 한두 가지와 뜨거운 밥과 거섶 서너 가지만 있으면 비빔밥은 근사하게 만들어집니다.

고흥만으로 낚시를 간 아이가 허탕을 친 미안막음으로 세발낙지 스무 마리를 사왔더군요.
머리의 크기가 골무만씩한 세발낙지가 비닐 봉지에 담아온 바닷물 속에서 경쾌하게 유영을 하는 모습은 귀엽기 짝이 없었습니다.
꼬물거리는 세발낙지를 손으로 죽 훑은 뒤에 바로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기억이 그리 멀지 않은데 오늘은 왠지 그걸 잡아서 요리하는 게 좀 망설여집니다.

낙지봉지를 받아 커다란 양푼에 부어 놓으니 요녀석들 노니는 품이 아주 세상 모르게 즐겁습니다.
마치 수영선수가 멋진 동작으로 골인 지점을 향하여 신속한 몸짓을 해나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식구가 많지 않으니 별다른 요리랄 것도 없는 낙지비빔밥과 연포탕을 만들었지요.

<낙지 비빔밥>

뜨거운 밥 위에 무생채 콩나물 무나물 김가루 여린 상추를 대강 뜯어 넣고 마지막으로 세발낙지를 살짝 데쳐 얼기설기 썰어 밥 위에 얹고 고추장과 참기름 한 숫갈을 떨어뜨리니 낙지비빔밥이 뚝딱 만들어지네요.
낙지를 양념하여 볶아 넣을 수도 있지만 살아 있는 세발낙지 본연의 맛을 그대로 살리고 싶어서였지요.
한참 신나게 노닐고 있는 고 녀석들을 잡아 맑은 물에 두어 번 헹구어 끓는 물에 퐁당 집어넣으면서 못할 짓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도데체 이런 식으로 사람의 입을 위해 희생되는 뭇 생명들의 수를 헤아릴 수나 있을런지요?

허나 미안하다는 생각은 잠시일 뿐, 어쩔 수 없는 포유동물로서의 식욕이 바로 발동합니다.
펄펄 살아 움직이던 낙지는 금세 음식으로 변하여 가족들의 섭생을 위해 밥상 위에 놓여졌고 모두들 즐거이 저녁 식사를 마쳤지요.
사실 손바닥만한 뽈낙이나 우럭새끼 같은 걸 집에 가져오면 전혀 반갑지 않았거든요.
고생해서 잡아 온 성의를 생각하면 별 맛도 없는 그걸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매운탕을 끓여 놓으면 며칠을 밥상에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결국은 음식 버리기 아까워하는 제 차지가 되고 마니까요.

<낙지 연포탕>

서울에서는 좀체 구하기 어려운 자연산 세발낙지를 보니 음식에 대한 욕심이 생겨 연포탕도 만들어보았습니다.
시원한 맛을 내기 위해 마른 새우와 무 대파 다시마로 육수를 내고 미나리, 표고버섯, 느타리버섯채, 청홍 풋고추편과 간마늘을 넣고 먼저 끓였습니다.
재료가 다 익어 끓고 있는 전골냄비에 헹구어 놓은 낙지를 집어 넣고 바로 불을 껐지요.
세발낙지는 워낙 부드러워 그냥 생으로 먹는 게 좋다니까 아주 살짝만 익힌 것이지요.
시원한 국물에 담긴 연한 세발낙지를 건져 먹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단출하던 밥상이 낙지 몇 마리가 더해짐으로서 아주 거나해지고 식구들 모두가 몹시 즐거워하시는군요.
'맛난 음식은 사람의 마음을 단박에 한 데로 모으는 마력을 지닌다'는 누군가의 얘기가 실감이 나데요.
 
차분히 내리는 겨울비가 반가운 휴일 아침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하지만 따끈한 국물 한 사발로 마음 달래시면서 편안한 휴일 보내시기 바랍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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