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사진- 오순옥>

원로 윤리학자 김태길 교수는 그의 장편 수필<흐르지 않는 세월>에서
'사랑을 위한 최선의 미덕은 속이지 아니함이요, 사랑을 위한 최선의 지혜는 속지 아니함이다.'라 했습니다.

자신의 대학 시절, 한 수려한 여성(친구의 여동생)과 오랫동안 사귀어 왔는데 막상 결혼할 시기에 이르니 그 여인은, 자신에게 한 마디의 언질도 없이 학업중(대학원)에 있던 당신을 외면하고, 사회적으로 부와 명예를 이미 획득한 남성한테 결혼해버려 황당하고 쓰라렸던 체험 끝에 얻어낸  잠언입니다.

많은 젊은이들 혹은 나이 드신 분들도 청춘의 시기, 이 비슷한 사랑의 아픔을  한두 번쯤은 경험하셨을 겁니다.
쓴 물을 들이키고 난 후라야 사랑 혹은 세상의 일들이 그렇게  호락호락 내 뜻대로만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을 속이지 않는 맑은 마음, 그리고 속임을 당하지 않는 지혜로운 판단력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두고두고 지녀야 할 德律이고  안목이지 싶습니다.
한두 번은 뭣모르고 속아 넘어갈 수 있어도 같은 사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속지는 않습니다.
말로나 업무로나 상품으로나 당장 보이는 눈 앞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이나 고객을 기만하는 행위는 결국 자신을 해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세상에 영원히 지켜지는 비밀은 없습니다.
혹 그 비밀이 세상에서는 지켜졌다하더라도 마지막 남은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나의 이기적인 계산속으로 상대를 속여 부당한 이득을 취했을지라도 내 마음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는 죄의식은 늘상 나를 괴롭힐 것이어서 나의 삶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일본의 저명한 작가 엔도 슈샤꾸의 작품 중에 <내가 버린 여자>란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 요시오까 쓰도모는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학비를 조달하는 가난한 대학생 시절, 모리다 미스라는 역시 빈곤한 시골 처녀를 길거리에서 유인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유린해버리고 심심파적으로 계속 만납니다.
대학을 졸업하자 유능한 엘리트인 요시오까 쓰도모는 명성이 자자한 대기업에 취직하고 능력 있는 여성과 결혼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주 잘 살아갑니다.
하지만 모리다 미스에 대한 죄책과 연민의 정 때문에 늘 마음 한 구석이 어둡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계모와 살던 시골집을 뛰쳐 나온 처연한 신세의 모리다 미스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도시의 밑바닥 직업 전선을 전전하다 한센씨병까지 얻게 되어  나환자 수용소에 수용 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요시오까 쓰도모는 모리다 미스를 돌보는 한 수녀한테서 보내온 낡은 빚문서 같은 편지 한 통을 받습니다.
모리다 미스는 자기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는 근황이 적힌  편지를 읽고, 요시오까 쓰도모는 자신이 저지른 무모한  젊은 날의 행각에 대해  절절히 뉘우치며 모리다 미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누지 못합니다.

'나는 손바닥으로 쥐어질만큼의 이 작은 행복을 결코 놓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 마음을 엄습해오는 이 깊은 슬픔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신이란 과연 있기나 하는 것인가?
나약하고 한없이 줄줄만 아는 모리다 미스에게 지워진 저 가혹한 운명을 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녀를  聖女라 부르게 하고 싶다.'

수녀에게서 온 편지를 쥐고 해질녘 아내 몰래 자기 집의 옥상에 올라가 어둠에 잠겨드는 잿빛의 도시를 내려다 보면서 이런 상념에 잦아들다 소설은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스무살 무렵 대학 2학년 때  어머니께서 일본어로 된 소설을 번역하여 들려주신 것인데 글을 쓰는 동안  선명하게 떠올라 간략하게 소개해 보았습니다.
하늘이 투명하게 맑습니다.
소슬한 바람도 여간 상쾌합니다.
이 마알간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한번 뿐인 내 삶을 잠시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시는 것도 추석 연휴를 잘 지내는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식혜 만들어 보았습니다.
엿기름이 좋아야 밥알이 잘 삭습니다.
엿기름을 물에 한 시간쯤 불립니다.
불린 엿기름을 잘 주물러 엿기름의 녹말이 잘 빠져나오도록 손으로 치댄 후 고운 체에 거릅니다.
밥은 고슬고슬하게 지어놓습니다.
거른 엿기름 물을 두어시간 가라앉혔다가 맑은 물만 따라내어 밥에 붓고 흰 설탕을 세 큰술 정도 넣고 밥알이 잘 떨어지도록 주걱으로 저은 후,
전기밥솥의 보온 기능에다 여섯 시간 정도 둡니다.
밥알이 삭아 동동 떠오르면 끓여 식혀 냉장하셨다가 드시면 됩니다.
약간의 밥알은 찬물에 헹구어서 물에 담궈 놓았다가 상에 내실 때 건져 식혜에 띄우시면 밥알이 하얗게 떠서 아주 보기 좋습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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