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

입력 2008-09-01 19:41 수정 2010-04-10 07:05




















안동 하회마을 따뜻한  뒷뜰

방울소리 울리는 마차를 타고
콧노래 부르며 님 찾아갔네
하늘엔 흰 구름 둥실 떠가네
풀벌레 다정히 우짖는 소리...

70 80 세대인 저희가 20대 때 즐겨 부르던 박인희의 썸머와인이라는 노래말의 일부입니다.
대중가요처럼 감정이입이 빠른 문화적 장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신바람 날 일은 거의 없는데도 주말 새벽, 저는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고향길에 올랐습니다.

사노라면 빛이라고는 정말 털 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기가 있습니다.
지나놓고 보면, 위기에 대처하는 본인의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호랑이가 열두 번 물어가더라도 제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위기 극복의 요체는 내가 그 위기 속에 매몰되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선 내가 나에게 긍정적인 주술을  걸어봅니다.
'나는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어, 암 극복할 수 있고말고.....'
'고난은 하나의 긴 순간에 불과할 뿐이야.'
그러면서 나의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나, 남의 일처럼 유연한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하면 까마득하기만 하던 탈출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소리 나지 않는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듯합니다.
많은 분들이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卽變 變卽通 通卽久)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명절에는 친가에 갈 생각을 아예 접고 산지 오래입니다.
맏며느리는 친정을 접어버려야 신간이 편안해지는 그런 자리입니다.
명절 며칠 전부터 죽어라 준비를 하여 차례를 지내고 나면 체력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고 마음마저 김이 빠져버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시기 일쑤였습니다. 
항상 '명절이 뭣이다냐? 행여 내려올 생각은 말고 거기 일이나 잘 하거라,'
부모님은 늘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다 싶었습니다.
부모님 살아계실 날도 많지 않은데 더 이상 뒤로 미룰 일이 결코 아닙니다.
명절 한 이주 전쯤에 다녀오면 시댁 일 치루는데 아무 지장도 없고 친부모님도 살펴드릴 수 있겠다 싶어 지난 해부터 그리 해오고 있는데 아주 잘 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가던 날이 장날이더라고 이번 고향길은 마침 아버지의 86회째 맞는 생신도 겹쳐 있어 두루두루 딸 노릇 좀 할 수 있었습니다.
자리가 바뀌면 잠을 설치는지라  아예 일어나 냉장고며 화장실 청소 마치고도 한참을 지나니 동이 터오릅니다.
광주에서 제법 큰 시장으로 통하는 남광주 새벽 시장에 갔습니다.

밥순이의 눈에 비친 고향 장터는 그야말로 대어를 기대해도 좋은 황금 어장입니다.
지금 한창 성수기인 건고추와 토란대 그리고 절임용 깻잎, 온갖 햇과일과 푸성귀들, 목포 먹갈치, 무안 뻘낙지, 제수용 생선(민어, 병어 ,도미, 조기)들을 물 좋은 것으로 맘껏 골라 염가로 살 수 있는 기회니까요.
토란대는 일을 줄이기 위해 깨끗하게 말려 놓은 것을 샀습니다.
깻잎은 지금부터 9월 중순까지가 장아찌를 담그는 시기인데 이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깻잎은 노지 것을 구입해야  맛도 좋고 오래 보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끗이 씻어서 약한 소금물(소금1:물10)에 서너 시간 가량 담궈 놓고 위에다 깨끗한 돌을 눌러 놓습니다.
깻잎이 숨이 죽어 차분해지면 건져서 물기를 뺍니다.
조림장과 액젓, 물엿을 함께 끓여 식혀 깻잎 위에 붓고 냉장보관 하는데 서너 차례 더 간장 물을 끓여 부으면 일년 내내 두고 먹을 수 있는 밑반찬이 만들어집니다.

산더미처럼 가득한 장거리들을 간하고 손질해서 정리하고 나니 한나절이 금세 가버리는군요.
뭘 좀 마련해서 아버지 생신상이라도 차릴려고 하니까 아버지는 날도 더운데 무슨 상이냐시며 외출 준비하라 하시네요.
어머니도 딴 때 같으면 외식에 반대하시지만 오늘은 아주 선선히 응하십니다.
우리 진호네 집에와서도 만날 일만 하니까 엄마 맘이 여간 괴로우시다면서 옷을 갈아입고 나서시네요.

아버지가 안내하시는 한식 뷔페에 가서 서울에서 자주 생각나던 남도 음식 실컷 먹고 시원한 생맥주도 한 잔 하니 기분은 부머랭이 되어 부웅 뜹니다.
계산은 아예 아버지 한테 미루어버렸습니다.
지불할 의사도 없으면서 폼만 잡는 쇼우는 하지 않았습니다.
친정행이 즐거운 또 하나의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 지갑 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 뒀다 어따 쓰겠냐 느그들한테 쓰는 것이제.."

선물을 마련해 가도 언제든지 배(더블) 장사입니다.
싯가 십만원 짜리면 이십만 원을 주십니다.
처음엔 사양했지만 부모님의 뜻을 알고부터는 그냥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돈은 부모님이 주시는 것이니 그냥 받으라 하시네요.
신세 좀 지기로 했습니다 .
아버지한테 받는 것보다 어머니 한테 받는 용돈의 액수가 훨씬 많습니다.
어머니가 주시는 봉투는 단위가 틀립니다.
이리 야마리 없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조건 없이 받는 돈은 마냥 즐겁습니다.


노부모님의 기침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향집.
그 순정한 사랑으로 인하여 내  지친 영혼이 회생되는 안식처. 잠깐의 휴식만으로도  온갖 욕망들이 각축을 벌이는 서울에서, 나의 立地를 찾고 관계의 그물망을 향해 촉수를 드리울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다음 날 아침 상경할 준비를 하는데 마당 한켠에 갈아 놓으신 상추가 어찌나 이쁘게 자랐던지 한 보따리 뜯어 왔습니다.
오늘 저녁 밥상에는 고향에서 가져온 갈치 조림과 상추 겉절이 만들어 보았습니다.

갈치는 무우와 잘 어울리는데 무우 맛이 아직은 좀 맵습니다.
애호박을 큼직하게 썰어 밑에 깔고 집갑장과 진간장 비율을 1대3으로 맞춰 다진 마늘과 풋고추 대파 양파 고춧가루를 넣고 양념장을 만들어 생선에 버무리고 물은 재료가 잠길 정도로 자작하게 붓습니다.
끓기 시작하면 숫가락으로 국물을 갈치 위로 자주 끼얹어 양념이 생선 속까지 배이게 합니다.
갈치는 지금부터 가을까지가 제철입니다.
알도 통통히 들어있습니다.
넉넉하게 사서 소금 간 해두었다가 구워 드시면 기름이 자르르 한 게 맛도 그만입니다.
명절 때 느끼하지 않은 밥 반찬으로도 요긴하게 쓰실 수 있습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

투표보험설계사·택배기사 등 노동3권 보장, 어떻게 생각하세요?

  • 특수형태 근로자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교섭을 통해 권익을 보호받을 것 112명 36%
  • 4대 보험 적용 등 고용주의 부담이 늘어나면 일자리가 되레 줄 수도 우려 202명 64%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