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바람] 천년학 - 길위의 인생

입력 2006-03-02 11:46 수정 2006-09-30 00:02
천년학 (영화 '서편제'중에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는 판소리영화이자 "길 위의 인생'에 관한 영화다. 그것은 득음의 경지를 추구한 어떤 재인의 치열한 삶에 관한 보고서이자, 티끌처럼 떠돌다 소리처럼 울림만 남기고 사라진 어떤 나그네살이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아직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을 향해 간다. 두려움, 설렘, 떨림을 가지고 말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끔, 장차 무슨 일이 닥쳐올지를 알고 싶어 할 때가 있다.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비도 하고, 조정하기도 하며,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자.
지금 생각하고 준비하는 일들이 곧 나의 미래로 드러날 것이다.

 

1. ‘천년학’의 작곡가 김수철이 걸어온 길
꼭 10년 전인 1993년 봄, 작은 키에 안경을 쓰고 다니는 한 음악가는 초조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다? 시간은 다가오는데, 악상은 잡히지가 않는다. 지난번에는 어쩔 수 없이 녹음을 취소했지만 이제는 또 다시 연기하고 오신 분들을 돌아가라고 할 수가 없다. 이 음악가는 도무지 생각이 정리되지 못한 채 녹음을 예정해 놓은 날 아침을 맞았다. 택시를 타고 녹음이 있는 스튜디오로 가는 이 음악가, 갑자기 멜로디가 머릿속으로 마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차 안에서 멜로디를 오선지 위에 그려나갔다. 녹음실에는 이미 연주가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형님들, 잠깐만 기다리세요.'하며 부지런히 악보를 그렸다. 그로부터 30분 후 녹음실에 뛰어 들어온 이 음악가는 대금연주가인 박용호씨에게 악보를 제시하며 말했다. "형님 이겁니다."

 

이 음악가가 누구인가? 바로 김수철이다. 작곡가이자, 가수이자, 연주인이자, 음악감독이자, 문화위원이자, 국악인이기도 한 김수철, 딱히 그 어느 하나의 명칭만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음악인 김수철, 그는 우리 음악사에 길이 남을 진정한 '작은거인'이라 하겠다. 80년대 그는 그의 작업들이 서양 것만을 따라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며, 전통적인 우리의 소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국악공부의 길로 들어선다. “국악은 골동품이 아닙니다. 국악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언제든 우리의 것이며 실제적인 우리의 소리입니다.”

 

영화 '서편제'에서 김수철의 음악은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소리', 곧 판소리라는 음악이다. 그러나 김수철의 '천년학'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판소리가 아닌 음악'으로서 영화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천년학'은 무겁고 장중한 분위기속에 남도 계면조의 짙은 한을 담은 청아하고 구슬픈 대금 가락이 흐느끼면서 한 음악인의 인생을 예고하는듯 하다. 부드러운 박용호의 대금소리는 마음에 한 점의 갈등도 없는 것처럼 잔잔하기만 하다. (그래서 종종 명상음악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영화의 전편을 관통하는 주제음악으로, 김수철 음악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악기 선택에도 신중이 기해졌는데 특히 '천년학'은 정악 대금으로 연주되었으며 산조 대금보다 훨씬 투명하고 깊이 있는 소리를 지녀 아악에 연주되던 악기다.


2. 소리꾼 유봉이 걸어간 길

<서편제>의 주인공 유봉(김명곤)은 소리꾼이다. 서울의 대가에서 배우다 파문당한 그는 남도를 떠돌며 소리로 연명한다. 영화는 그가 드난살이하는 과부댁과 눈이 맞아 함께 도망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과부댁은 아이를 낳다 죽어버린다. 이때부터 유봉은 자기 피도 섞이지 않고 서로 배도 다른 남매를 데리고 길 위를 떠돈다. 영화에서 유봉일가가 길을 가는 장면은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어가며 열여섯 번 되풀이해 나온다. 처음엔 네 식구,다음엔 세 식구, 다음엔 두 식구, 마지막엔 송화 홀로 떠나 버린다. <서편제>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딸자식의 소리를 좋게 하기 위해 한약을 먹여 눈이 멀도록 하는 대목이다. 소리꾼 유봉은 얘기한다. "한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해라.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하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정한이 많다고들 허지. 허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서편제도 없고 득음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눈먼 딸 송화는 보살 같은 얼굴로 앉아 가만히 듣고만 있다.

 

딸을 명창으로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리꾼 유봉, 산속 깊은 곳에서 소리를 할 적이면 계곡으로부터 그 메아리가 되돌아온다. 사랑하는 딸의 눈을 멀게 하려는 아비가 이 세상 그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육신의 눈, 세속의 눈, 쾌락을 바라보는 눈, 그 눈을 멀게 함으로써 진정 소리의 세계를 바라보고 듣게 하려는 깊은 예술가 정신, 딸의 건강, 딸의 소리만을 위해 남의 집 닭이라도 삶아 먹이려는 그 정성, 두들겨 맞으면서도 득음의 계기를 맞이한 딸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유봉, 이런 애절한 사연, 이런 뭉클한 예술세계를 ‘천년학’의 대금 선율은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아닐까? 선율은 사라지지만 우리에게 감동을 남긴다. 살아갈 힘과 비전을 던진다.

 

3. 임권택 감독이 걸어가는 길
관객들이 가장 충격적인 영상으로 꼽았던 장면을 바라보는 임감독의 관점은 달랐다. "너무 잔인하지 않냐 그러는데, 이건 자기가 살아가면서 최고의 가치를 무엇으로 삼는가 하는 것과 연관이 된 문제예요. '되다 만 소리꾼'인 유봉의 인생에서는 완성된 소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생의 가치죠. 그런데 자신은 못 이뤘으니까, 그 욕망을 딸자식한테 투영한 거죠. 어영부영 사는 사람이 아니라 득음의 경지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대담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저지를 만한, 개연성이 있는 모티브라고 받아들였어요. 물론 딸마저 달아나면 혼자 남는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이기적인 행동이란 면도 없지 않아요."  "완성된 세계에 들고자 하는 사람의 욕심은 누구라도 있는 거지요. 제게도 그런 욕심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정진하게 되고, 결함이 덜한 영화를 만들 것이란 생각을 늘 하죠."

 

최근 투자자 확보의 어려움으로 무산될 뻔했던 그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 의 재출발을 알리는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다. “예전엔 그저 영화 안에서 허우적대기만 하고 살았는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내 삶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돼요. 그러면서 내가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무엇을 했는지 뒤늦게 짚어보고 있죠.”
길 위에서 터득한 나그네의 지혜였다.
 
길이란 게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닌 흔적이 쌓이고 쌓여 길이란 것이 되었다. 사람이 지나지 않았어도 길을 만들고, 다리를 놓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요즘이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아졌지만 나에게 주어진 길이 무엇인지 헷갈리게 마련인 요즘이기도 하다. 올해엔 또 어떤 길을 걸을지 가만히 떠올려 보자. 아직 늦지 않았다.

 

이번 칼럼에 소개된 곡은 한경닷컴이 주최하는 퓨전국악공연 '오케스트라의 新바람' #1 우리가락 우리문화에서 연주될 곡입니다.


2006년 올 해의 칼럼니스트 신인상 수상. 현재 에듀엔코칭연구소 대표, 에듀엔코칭집중력센터 원장, 한국코치협회 인증코치, 한국라이프코치협회(KLCA)이사, 서울시 교육청 사이버교사, MBTI, STRONG, BASC, DiSC, 버츄프로젝트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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