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順應)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입력 2011-03-15 18:20 수정 2011-03-15 18:20


생각전환 14

자기억압(抑壓)의 치유로 잠자는 나의 에너지를 깨우자.









자신감 부족으로 나를 억압하며 웅크리고 지낼 때, <연금술>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오는 ‘연필 같은 사람’ 이야기를 읽었다. 연필 같은 사람은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태로, ‘연필에서 중요한 것은 외피가 아니라 심(心)이다. 마음속의 소리를 들어라.’는 문장에 영감을 받았다. 연필의 외피는 육체를 의미하고, 심은 정신과 영혼을 의미한다. 연필의 심에서 색깔이 나오듯, 마음의 중심에서 행동이 나온다. 연필심(鉛筆芯)은 수백 가지 종류가 있듯, 우리의 마음은 환경과 분위기에 따라 수천갈래로 파생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마음의 중심을 잡고 때로는 순응을 하라고 배웠다. 연필이 심이 부러지면 글씨를 쓸 수 없듯, 자기가 자기를 모르고, 자기 주관이 흐리고, 자아를 누르면 자기내면의 큰 에너지를 활용하지 못한다. 기분 나쁜 일로 자아를 꺾거나, 미련과 집착으로 마음을 구기지 말고 마음껏 펴야 이미 다가온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고, 오뚝이처럼 몇 번이고 일어설 수도 있다.



어느 날, 덩치 큰 코끼리가 춤추고 축구하는 장면을 보았고, 코끼리가 야성을 잃고 온순하게 길들여지기까지의 과정을 보았다. 어린 야생의 코끼리를 길들이는 훈련(태국 용어로 피잔 의식)을 보면, 어린 코끼리를 작은 울타리에 가두고 ‘커창’이라는 쇠꼬챙이로 찌르고 때려서 사람만 봐도 질리게 만든다. 코끼리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순응(順應)이 아니라 인간에게 반복적으로 당한 공포가 무서워 그냥 살기 위해 조련사가 보내는 신호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코끼리가 억압에 길들여지면 힘이 센 코끼리로 성장해서도 작은 말뚝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한다. 억압에 길들여진 코끼리를 보면서, 스스로 눌러 버린 자아, 아픔에 눌려서 갈 길을 앓은 나와 우리들의 모습을 동시에 보았다.



코끼리가 억압에 길들여지듯, 우리도 억압에 길들여진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심성(야성)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수많은 길들임의 수업을 받는다. 어려서부터 교육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얼차려와 체벌을 받고, 정도와 합리라는 이름으로 잔소리와 바가지를 긁히고, 사회는 서로 살기 위해서 예절과 질서를 강요하고, 조직은 생산성 논리로 인간을 길들인다. 우리는 잔소리가 반복되고, 조직의 통제규범과 권위라는 횡포에 시달리면 저항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거나, 억압을 즐기는 의식적 노예가 된다. 외부의 억압은 지속되지 않는데, 당장 손해 보는 것이 두렵고, 따돌림과 왕따가 싫어서 본심을 감추고 따르는 척 한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지만 억압의 사슬에 걸리면 자기를 잃는다.



조직이 관행적으로 억압하는 것도 있다. 조직이 일방적이고 관행적으로 인간을 억압하면 사랑과 진실의 언어가 사라지고, 겉치레와 미움의 언어가 가득 차 마음은 아니면서 겉으로는 웃는 체 한다. 직장인들은 일보다 사람이 어렵다고 한다. 일은 생존과 보람을 얻는 심신의 노동이자 놀이지만, 조직이 나를 지배하고 억압하면 사람이 싫어진다. 조직의 악마는 조직이 부여한 권력과 법(규정)을 앞세워 간섭하고 억누르며, 생산성을 이유로 인격을 해체하고, 차별 대우와 공정하지 못한 보상 등 사람을 압박한다. 조직이 일의 생산성을 높이고, 서로 살기 위해 통제와 간섭, 힘을 돋움 하는 활동은 불가피하지만, 질서유지라는 이름으로 억압하고, 조직의 이익을 위해 억압의 쇠꼬챙이로 찌르고, 불편한 존재를 감정적으로 쳐내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자기의 기(氣)를 죽이고, 자기를 억압하는 것은 조직과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자기 억압은 자기 영성을 잃고 스스로 만든 것도 있고, 지나친 죄의식과 결벽증, 두려움과 걱정, 집착과 불안이 발전하여 자기를 억압의 사슬로 묶기도 한다. 스스로 자기를 억압하면 겉으로는 순응을 하지만, 각종 스트레스를 만든다. 자기를 억압하고 순응의 사슬로 묶을수록 미완성 욕망은 풍선처럼 삐져나가 결핍감과 피해의식을 만들고, 결핍감은 뭔가 대리효과를 찾지만 녹녹치 않다. 결핍의 마술에 걸리면 만족 허기증으로 분노와 화를 만들고 아집과 집착의 덫에 걸려 싸움이 잦다. 자기를 억압하는 사람은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에 대해 불평하고 상대마저 억압하려고 한다. 자기를 억압하는 사람은 남도 억압하고 남까지 피곤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도 억압받지 않을 자유의 존재다. 나는 나의 행복을 찾고, 만들고 누릴 책임과 사명이 있는데, 무지와 어둠에 쌓여 스스로 억압하고 있다. 빛이 없는 동굴에 독성이 강한 곰팡이가 자라듯, 자기 억압의 동굴에는 불행이 자란다. 억압의 동굴에 갇혀 영성을 잃으면 지은 죄도 없이 우울하고 위축된다. 잡초를 제거해야 곡식이 잘 자라듯, 나를 억압하는 근심과 걱정을 털어내고 버려야 한다. 감성과 영성으로 자기억압을 치유해야 억압이 만든 위축과 주저함, 모순과 갈등이 사라진다. 함께 행동하는 감성이 생기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게 되며, 스스로 갇힌 마음의 감옥소를 해방시키게 된다. 억압을 풀어야 행복과 영성이 함께 자란다.



자기억압에서 행복으로의 진화하는 길



포수에게 잡혀와 닭장에서 닭들과 함께 성장한 어린 독수리가 있었지. 독수리는 닭 먹이를 먹으면서 몸은 성장했지만 닭장에서 길들여지면서 날개는 퇴화되고 발톱은 무디어지고 눈빛을 잃었어. 그렇게 닭들과 어울려 지내던 어느 날, 창공에서 날쌘 독수리가 닭장을 뚫고 들어와 닭을 낚아채어 날아가 버렸다. 닭장 속에서 자란 독수리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방금 닭을 낚아 채간 독수리가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알았고, 자기도 독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 나는 원래 독수리였구나!’ 라는 각성과 함께 독수리는 눈이 빛났고, 발톱과 날개에 힘이 솟았다. 몇 차례의 날개 짓 끝에 독수리는 닭장을 박차고 나가 창공의 자유를 얻었다.



닭장을 탈출하여 창공을 찾은 독수리 이야기는 행복은 자기 깨우침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아직도 세상에는 힘이 지배하는 조직과 규제가 개인의 자아를 가두기도 하지만, 행복한 자아를 가두고 밀폐시키는 것은 자신의 존귀함을 모르는 정체성 상실, 소아적이고 극단적인 생각, 자기가 보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인줄 아는 독선 때문이다. 자기를 모르고 작은 세상에 갇힌 사람은 어둠과 불행이 오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극단적인 짓을 한다. 닭장에 갇혔던 독수리가 자아를 발견하고 창공을 찾아가듯, 작은 세상에 갇힌 개인이 행복하려면 존재이유와 사명을 발견하고, 삶에 따르는 고통을 발전을 위한 시련으로 인식하고, 큰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 앞으로 나가야 한다.



마음으로 고통스런 나의 자화상을 보라. 마음은 갈 수 없는 공간이 없고, 가서는 안 되는 성역도 없다. 마음은 내가 설계하는 대로 존재한다. 그동안 내가 설계한 마음에는 모순이 없는지?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으로 나의 현재 모습을 분해 해보자. <이 세상에 태어난 사명을 모르고 생리적으로 사는 나, 일에 쫓겨 행복을 잊고 사는 나, 작은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고, 상대가 던진 무심한 말에도 자존심 상하는 나, 지식 때문에 더 복잡하게 사는 나, 나는 우주의 주인이라고 하면서도 빌려주고 받지 못한 10만원 때문에 애태우는 나, 욕망과 체면의 합선으로 때로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나, 애틋한 대상과 가까운 사람마저 때로는 미워하고 귀찮아하는 나, 내 것이 아닌 것을 내려놓는다고 하면서도 소유에 집착하는 나 등> 나는 나로서 위대하면서도 나는 나 때문에 추할 수도 있다. 현재가 불행하고 불안한 이유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 만든 마음 설계도의 오류, 작고 초라한 마음이 작은 행동을 만들고, 스스로 고통의 울타리에 갇힌 나를 보자.



불행한 자화상을 보았다면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전을 찾아야 한다. 현재가 불행한 자화상이라면 그 원인은 분명 나에게 있다. 자각의 눈과 내면의 대화로 불행한 창살에 갇힌 원인과 불행에 잡힌 이유를 알아야, 불행을 치유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분명하게 밝힐 것은 내가 어둠에 잠겨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나의 행복을 돕지 않는다. 초월적 혜안으로 불행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고, 내가 꿈꾸는 행복이 있는데, 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가? 정말로 행복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나에게 있는가? 현재 내가 만든 불행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성공이라는 좁은 길에 집착하여 행복이라는 열린 길을 잃었고, 행복은 웃음과 함께 바람처럼 오는데 욕심으로 귀와 눈이 멀었고, 쉽게 일을 이루려하다가 당당함을 잃었고, 준비와 노력 없이 행복을 바라고, 불행을 행복의 발판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문하여 현재가 불행한 이유를 찾고 새로운 각성을 백지에 적어보자.



불행한 이유를 알았다면, 녹슨 청동 거울을 닦듯이, 욕심으로 얼룩진 나의 자화상을 마음으로 닦아야 한다. 인위적이고 형식적인 마음이 아닌 맑고 깨끗한 영혼의 비단으로 닦아야 한다. 행복의 신은 진정한 뉘우침 없는 자에게는 새로운 변화를 주지 않는다. 내가 만든 불행의 거울, 나의 추한 모습이 비치는 나의 거울을 깨지 말고 천천히 닦아야 한다. 독은 독으로 제거하고, 녹은 녹으로 닦아야 하듯이, 불행은 없다는 각성으로 불행을 치유하고, 선은 선으로 키우듯이, 잠자는 나의 영혼을 깨워 나의 존재 이유와 사명감으로 자아를 찬양하고, 행동하면서 행복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불행이 제거된 자리에 행복의 빛을 비쳐야 한다. 거울의 녹을 제거하면 비로소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듯이,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애틋하게 보이고, 낙엽을 보면서도 눈물이 흐르고, 원망할 일에도 감사함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체가 행복임을 알게 된다. 행복이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고통을 발전을 위한 시련으로 생각한다면 인생이 진화할 것이다.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행동으로 만든다. 행복한 자화상 또한 누가 그려주지 않는다. 내가 품은 행복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행복의 자화상을 그려야 한다. 행복한 자화상은 짧은 이야기다. ‘태어났노라. 행동했노라. 행복했노라.’ 여건이 좋아야 행복하다는 것은 구시대 행복론이다. 이제는 ‘불행하기에 더 행복할 수 있다.’ 라는 역설이 통하는 시대다. 아무도 탓하지 마라. 모든 것은 나의 자아에서 시작되고 종결된다. 나의 행복을 찾기 위해 나를 보고, 불행의 원인을 찾고, 마음으로 불행을 닦고 행동해야 한다. 행복한 자화상을 정립하면 마음이 즐거워 입가에 웃음이 주절주절 달리고, 자기 만족도가 높아 행동에 힘이 넘치고, 상대와 함께 하면서 사는 기쁨을 찾는다. 마음에도 없으면서 순응하고, 순응하는 척 하면서 열받는 일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박필규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1984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1988년 '국방일보' 호국문예 수필 분야 당선, 2004년 중령으로 예편, 월간『시 사랑』을 통해서 등단, 2004년부터 작가로 활동 중이며, 인문학과 군사학을 접목한 새로운 집필 영역 개척, 2014년 '군인을 위한 행복 이야기', 2013년 '버리면 행복한 것들' , 2012년 '군인을 위한 경제 이야기', 2009년 '경제형 인간' , 2008년 '행동언어' , 2004년 '마주보기 사랑' 출판. 현재 파주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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