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고 진다. -죽음에 대하여!

입력 2010-10-09 11:02 수정 2010-10-10 12:13












행복 전도사, 고(故) 최 윤희 부부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희귀병으로 인해 700가지 고통 때문에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사를 접하고 충분히 이해를 하면서도 매우 아쉽습니다. 우리에게 행복을 전도하신 분인데... 안타까운 죽음을 보면서 필자가 겪은 여러 형태의 죽음이 떠올랐다. 어려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고, 성장하면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았고, 군 생활을 하면서 많은 죽음을 보았고, 죽을 고비도 몇 번을 겪었다.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죽음 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과 교훈을 준 것은 장인어른의 죽음이다. 죽음의 문제는 누가 정리해도 영원한 미완성의 글이 되겠지만, 그동안 미루어 왔던 죽음 문제를 정리하고자 한다.



장인어른은 작년도 이맘 때 쯤, 담도암 판정을 받고, 3달간의 투병생활을 했다. 암센터에서도 조치할 것이 없다하여 일산 소재, 호스피스 병동으로 모시고 간병을 했다. 아쉬우면서도 긴 시간이 흘렀다. ‘잘 있어라. 그동안 고맙다.’는 유언이 있었고, (2009년 12월 25일 12:30분) 기계 수치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맥박 105 / 산소 수치 65, 70/40, 20/5 , 0. 띠-띠~~~ 네. 0 00님 운명하셨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겠습니다. 네. 12:40분부로 운명하셨습니다. - 충격, 슬픔, 경황없음, 대혼란, 우왕좌왕, 시간과 공간의 흐트러짐 - 1일차 장례식장에 안치, 2일차 입관 식 거행, 3일차 고인의 유언대로 화장을 했다.



365일X 74년 =‘0’로 정지된 관이 화장을 위한 마지막 절차를 밟았다. 독경과 통곡 속에 불을 켜는 스위치가 작동했고, 1시간 뒤에 관을 안치했던 화덕이 나왔다. 덩그런 엉치 뼈, 흐트러진 등골뼈, 순서를 잃고 부서진 머리 뼈, 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조각 뼈들, 타지 않은 동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깨끗한 無(무)였다. 고인의 74년의 수고와 고생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고, 뼈 속까지 아린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야 할 가족을 걱정하셨던 따스한 마음도, 병든 몸을 회복시키려고 투입된 약과 주사약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림 재주와 의술을 베푸셨던 손도, 부지런하셨던 발도, 마지막에 복수(腹水)가 찼던 배도 없었다. 뜨거운 불에 녹아 무(無)의 세상으로 사라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함께 했던 기억이 생생한데, 인간 생명체의 사라짐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도 슬펐고, 몸서리쳐졌고, 많이도 울었다.



죽음은 존재의 끝인가? 새로 태어나기 위한 휴식인가?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던 장인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죽음은 인간 실존의 끝인가? 새로 태어나기 위한 휴식인가? 죽음은 새로운 세상으로 전이(轉移)하는 과정인가? 죽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지만, 돌고 돌아도 끝이 잡히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을 명쾌하게 알 수 없었다. 죽음은 두렵고 기분 나쁜 일이기에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한다. 죽음에 대한 정리된 생각 없이 죽음을 ( 몸의 인연이 끝나고 쉬려고 하는 막판에 이르면) 맞이하면 몸부림을 친다. 죽음에 대한 정리된 자기 확신이 없으면 삶은 헛것으로 종결 된다. 행복한 삶을 위해 죽음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생각을 해보자.



1. 죽음은 삶보다 심오한 문제다.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보다 더 심오하고 덩치가 큰 분야다. 죽음 문제를 과학으로 증명하기 전에는 모두 상상이요 추측이며,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다. 죽음에 대한 상상적 해석은 다양하고 죽음에 대한 믿음은 지금도 제 각각이다. 1) 무신론자는 죽으면 모든 몸에 깃든 생각과 영혼도 종결하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2) 유신론자는 신이 부여한 바코드인 영혼은 죽지 않기에 죽음은 천상으로 가는 중간평가로 인식하고, 3) 윤회설을 믿는 인류의 1/2의 인구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살아서 쌓은 공덕에 따라 새로운 몸을 받는다고 믿는다.

죽음을 생명체의 완전한 종말로 보든, 영혼의 소풍을 위한 육신의 껍질을 벗는 탈바꿈으로 보든, 신의 심판을 받는 과정으로 보든 죽음에 대한 신념과 수용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신념이 생기면, 삶 자체가 결론이 명확한 논문처럼 한 길로 당당하게 갈 수가 있고, 시간이 갈수록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2. 소아(小我)를 죽여서 큰 나로 다시 살자.

인간은 울면서 태어나, 웃고 울며 살다가 죽을 때는 말이 없다. 꽃이 피면 열매를 위해 져야 하듯, 태어난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어쩌면 죽는다는 것을 모르기에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신앙심이 강한 자는 죽음에 대해 초연하지만 막상 죽음에 임박하면 평정심을 잃는다. 누구나 죽음은 기분 나쁘고, 생각하기 싫은 두려운 영역이며, 몸서리를 치는 공포의 대상이다. 소도 죽음에 임박하면 어떤 허무를 느끼는지 운다고 한다.

기분 나쁜 죽음을 먼 거리에 두고 두려워 하다가 불치의 병을 얻거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면 한꺼번에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죽음이 두렵고 기분이 나쁘다고 외면만 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자기 나름대로 죽음의 문제를 정리하고, 죽음의 공포가 있다면 신에게도 의지하고,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는 부정적인 모습(작고, 어둡고, 걱정 많고, 집착하고, 상처 받는)이 있다면 스스로 죽여서, 새로운 모습(고요와 밝음, 힘찬 여유와 웃음)으로 다시 태어나자. 나의 의지로 내가 나의 모순을 수시로 죽일 수 있다면 죽음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다.



3.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

많은 죽음을 지켜보면서 죽음을 먼 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나 삶에 집착을 한다. 당신도 이제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해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무리 대범한 사람도 머리털이 설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죽음의 문제를 논리와 상식의 범주를 뛰어 넘어 보다 편하게 수용하려면, 1)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없으면 인생 막판에 가서, -몸과의 인연이 끝나고 몸을 구성한 요소들이 자연으로 돌아가 쉬려고 하는데도 - 추하게 몸부림을 친다. 막판의 추함을 줄이려면 죽음을 다시 태어나기 위한 휴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 죽음도 삶의 일부다. 죽음을 삶의 마지막 과정, 영혼의 순환과정으로 수용하면 죽음도 자연스럽다. 죽음의 순간을 생각하면 다툼과 부정적인 마음을 쉽게 버릴 수 있다. 3) 죽음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다가온다. 일정 연령에 이르면 유언을 미리 남겨두고, 몸에 이상이 오면 정신이 맑을 때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정리해 달라는 말을 미리 해두어야 한다. 생에 대한 집착으로 죽은 이후의 일에 대해 미리 말을 못하면 결론이 없는 인생이 될 수도 있다.
박필규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1984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1988년 '국방일보' 호국문예 수필 분야 당선, 2004년 중령으로 예편, 월간『시 사랑』을 통해서 등단, 2004년부터 작가로 활동 중이며, 인문학과 군사학을 접목한 새로운 집필 영역 개척, 2014년 '군인을 위한 행복 이야기', 2013년 '버리면 행복한 것들' , 2012년 '군인을 위한 경제 이야기', 2009년 '경제형 인간' , 2008년 '행동언어' , 2004년 '마주보기 사랑' 출판. 현재 파주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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