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에 물 붓기 vs. 부을 물조차 없는 상황

입력 2009-11-21 21:32 수정 2009-11-21 21:34
얼마 전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시중에서 베스트셀러가 된지 오래된 책이지만 저는 이번에 읽게 되었네요.^^; 이 책에서는 20대의 실업문제가 세대내의 경쟁이 아니라, 세대간의 경쟁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기성세대인 30대, 40대의 세대가 일자리를 선점,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경제적 약자인 20대는 직업을 구할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이 책에는 그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으니 책 내용의 찬반을 떠나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청년실업문제 역시 우리시대의 아픔 중의 하나이니까요.

 

뜬금없이 질문하나 해보겠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와 「부을 물조차 없는 상황」

 

위 두 상황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괴로울까요? 사람들의 성향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두 상황 다 괴롭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이는 ‘인플레이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일을 해 돈을 벌어도 치솟기만 하는 물가로 인해 화폐의 실질 구매력이 떨어지면 자산이 쌓이기는커녕 오히려 살림살이만 더 힘들어 질 뿐이니까요. 이런 상황이 심해지면 사람들은 땀 흘려 일하려 들지 않습니다. 국가적으로 볼 때도 노동생산성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나라 경제가 엉망이 되겠죠.

 

한편, 부을 물조차 없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이는 ‘실업’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일자리가 없어 자산을 쌓는 것은 고사하고 당장 끼닛거리도 없습니다. 이쯤 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불만과 증오를 가지게 됩니다. 불만과 증오가 가득한 국민들만 사는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될 리가 없겠죠. 따라서 정부는 인플레이션과 실업을 동시에 줄이기 위해서 그토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영국에 ‘필립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경제학자죠. 이 사람이 1958년에 논문 한편을 발표했답니다. <1861년~1957년 중 영국의 실업률과 명목임금 변화율 사이의 관계>라는 다소 긴 제목이었죠. 여기서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한 사실을 발표합니다.

 

실업률이 낮은 해에는 물가상승률이 높았고, 실업률이 높은 해에는 물가상승률이 낮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조사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여전히 같은 현상이 나타났죠.

 

다시 말해 단기적으로 볼 때 인플레이션율과 실업률은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의 단기적인 역(逆)상관관계를 그래프로 그린 것을 ‘필립스 곡선(Phillips Curve)’이라 부릅니다.

 

[필립스 곡선]


* 필립스 곡선이 x절편(u*)에서 마이너스(-)로 내려간 이유는 인플레이션율은 제로(0)나 마이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업률은 제로(0)가 될 수 없기 때문에 y축에서의 절편은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경제상황에서도 실업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자연실업’이라고 한다.

 

앞서도 제가 언급한 바 있듯이 인플레이션(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나 실업(아예 부을 물조차 없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둘 다 고통스런 일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인플레이션율과 실업률을 합한 값을 ‘고통지수(misery index)’라 부릅니다.

 

솔직히 사람들은 행복한 살림살이를 원하기 때문에 이 둘을 동시에 줄여 고통지수를 최대한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 같습니다. 필립스 곡선에 의해 실업을 줄이면 인플레이션이 올라가고 인플레이션을 줄이면 실업이 올라가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필립스 곡선은 정부의 입장에서는 귀가 솔깃한 대목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고용을 늘리라고 기업에게 직접 으름장을 놓는 것 보다는 좀더 세련된(?) 방법으로 실업률을 줄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죠. 즉, 통화량을 늘리거나 유동성공급정책을 펴서 시중에 돈을 풀면 물가가 상승할 것이고, 그럼 필립스 곡선에 따라 실업률은 반대방향으로 줄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필립스 곡선은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금융정책이나 재정정책을 펴는 근거가 됩니다.

 

물론, 인플레이션율과 실업률의 역(逆)상관관계는 어디까지나 단기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며, 장기적으로 볼 때는 서로가 별 상관관계가 없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다시 말해, 정부의 금융정책이나 재정정책이 단기적으로는 실업률을 줄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인플레이션율만 높이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단기처방만이 능사는 아니니 정책수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은 특히 금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부의 유동성공급정책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 칼럼의 내용은 제가 쓴 「지표,지수만 알면 경제가 보인다」 에서 일부 발췌하였음을 밝혀둡니다.)
증권회사의 PEF 운용역으로 있으며, 저서로는 '알기쉬운 금융상식1,2,3', '부자의 첫걸음 종자돈 1억만들기'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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