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2)

입력 2008-09-18 11:02 수정 2008-09-18 11:02
1997년 외환위기가 발발했을 당시, 2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던 저는 종금사의 국제금융부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도탄에 빠진 한국경제를 구제하겠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외국자본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계기가 바로 97년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금융산업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외국(특히 미국)의 자본뿐만 아니라 선진금융기법이 들어오면 무지몽매한 한국금융산업이 선진국수준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떠들어 댔습니다.

 

당시만 해도 첨단 금융기법으로 무장한 실력 있고 정보 빠른 외국계 금융회사에 매료되어 있던 정말 아무 것도 모르던 국제금융부 말단 사원인 저는 그 말에 적잖이 고무되었습니다.

 

‘고통을 감수하고 빗장을 모두 열어젖히면 우리도 그토록 멋져 보이는 골드만삭스나 JP모건, 메릴린치와 같은 글로벌 IB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구나!’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났습니다. 리먼브로더스의 파산, 메릴린치의 매각은 10년 전 제가 그토록 동경하던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허점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기하급수적인 액수의 레버리지 투자와 갖가지 복잡미묘한 파생상품의 판매가 얽히고 설켜 이를 운용하는 사람조차도 도무지 어디서부터 실타래를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는 괴물로 변해버린 21세기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의 자화상인 듯 합니다.

 

그리고 그 충격은 10년 전 모든 고통(금융계의 구조조정, 인력감축, 막대한 국민세금의 지원 등)을 감수하고 빗장을 열어 제친 우리나라 금융시장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작금의 사태를 보니, 97년 당시 그 혼란의 시기에 한 구석탱이를 참여했던 금융업계의 한 사람으로서 만감이 교체합니다…

  

따라서 개발도상국들이 1980년대 및 1990년대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강권에 못 이겨 자본시장을 개방한 뒤로 금융위기를 훨씬 자주 경험하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는 없다. 탁월한 경제 사학자 두명이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세계 금융의 개방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1845~1971년 사이에 개발도상국들은 금융위기는 단 한번도 겪지 않았고, 통화위기는 16번, (금융위기와 통화위기가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 ‘쌍둥이위기’는 한번 겪었다. 그러나 1973~1997년 사이에 개발도상권 국가들에서는 17번의 금융위기와 57번의 통화위기, 그리고 21번의 쌍둥이위기가 발생했는데, 이는 1998년 이후 (브라질, 러시아, 아르헨티나 등에서) 발생한 대규모 금융위기는 포함되지도 않은 숫자이다.

현재 국제금융흐름의 변동성과 경기변동증폭성은 자그디시 바그와티 교수와 같은 열렬한 세계화 지지자조차도 ‘막가파식 국제금융자본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할 정도로 심각하다. 1980년대 이래, 특히 1990년대 들어 자본시장개방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IMF조차도 최근 들어서는 태도가 바뀌어 개발도상국의 자본시장개방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크게 약화된 상태이다. IMF는 현재 “자본계정의 때 이른 개방은… 유입구조를 불리하게 만들고, 해당국가에 갑작스런 자금흐름의 중단이나 역류상황에 노출시키는 등의 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에서

 

나쁜 사마리아인인 부자나라들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유무역을 권장하면서, 자신들이 모두 완전한 자유무역은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운 무역을 하고 있다는 걸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여섯 살 먹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보고, 성공한 어른들은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자립을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는 논리를 들이대면서 여섯 살 먹은 그 아이를 일터로 보내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다. 성공한 어른들은 성공을 했기 때문에 자립을 한 것이지, 자립을 했기 때문에 성공을 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경제적, 정서적으로 든든한 지원을 받아온 사람들이다. 2장에서 논의한 바처럼 부자나라들은 자국의 생산자들이 준비를 갖추었을 때만, 그것도 대개는 점진적으로 무역을 자유화했다. 요컨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무역자유화는 경제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발전의 결과이다. -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에서
증권회사의 PEF 운용역으로 있으며, 저서로는 '알기쉬운 금융상식1,2,3', '부자의 첫걸음 종자돈 1억만들기'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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