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靑松), 해우하는 여행 - 유민희

입력 2015-06-02 14:38 수정 2015-06-04 09:37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눈을 뗄 수 없던 풍경 덕에 유일하게 끝까지 본 영화가 있었다.

 '봄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 특유의 잔혹한 감성이 영화를 감싸고 있었지만, 영화의 배경이 된 주산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신록이 싱그러워진 오월, 주산지가 있는 그 곳, 바로 청송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

최근 나를 괴롭힌 일련의 일들에 대한 아픈 마음과 그 와중에 내 마음속에 들어와 버린 ‘그 사람’ 에 대한 설렘. 아픈 것과 설레는 마음은 상반된 감정이지만 둘 다 나를 괴롭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며칠간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괴로운 기억들을 한시동안 잊을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청송(靑松). 주왕산(), 주산지()

 

한 번도 일어나본 적 없는 시간 새벽 4시, 아침 안개에 싸인 풍경이 일품이라는 말에 묵고 있던 객주문학관에서 버스를 타고 주왕산 한쪽 자락에 있는 주산지를 향해 출발했다. 한참을 달려 주산지 입구에 버스가 멈췄다. 싸늘한 새벽 기온에 몸을 움츠리고 발걸음을 서둘러 20분가량 달님이 비춰주는 희미한 산길을 올랐다. 싸늘한 기온에 걸음을 서둘렀다. 조금씩 숨이 차오르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일행들은 분주히 사진 찍을 자리를 잡았다. 이에 질세라 단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를 들고 나도 자리를 잡았다.

세룰리안과 프러시안블루를 섞다 만 수채화 같은 하늘에 짙은 산과 은은한 ‘달님’.

동은 트지 않고 묘하게 섞인 파란색 하늘에 은은한 달만이 구름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일출을 기다리며 아쉬운 마음에 달이라도 찍어보았다. 촬영한 사진을 보니, 하늘빛과 달님의 조화로 채색된 아름다운 풍경이 그림 같이 카메라에 아로 새겨져 있었다.

 



 

주산지의 ‘달님’은 태양이 떠오르는 길로 인도하는 조용한 스승 같았다. 달이 구름에 가려졌나 싶을 때 날이 밝았다. 흐린 날씨로 인해 제대로 된 일출도 볼 수 없었고 주산지만의 비경인 물안개도 볼 수 없었다. 영화와는 다른 주산지의 모습에 이내 실망했지만, 투명한 호수 가운데 조용히 뻗어있는 나무들이 호수위에 비친 모습은 아름다웠다. 운치 있는 모습을 담고자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자꾸만 ‘그 사람’이 생각났다. 나와 그 사람 사이에는 흐린 날씨 속의 주산지와 나만큼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 새벽녘에 찍었던 하늘빛처럼 아름답지만 고요하기만 한 그는 내 곁에서 저 달님처럼 나를 지켜봐줄 사람이 될까.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안개와 서늘한 기운이 산 위에서 밀려 내려왔다. 올라올 때보다 더 추위에 떨며 내려가면서도 사진에 입문한 재미에 예쁜 야생화와 풍경을 놓칠 수가 없어서 다시 셔터를 눌렀다.

 





 

아침을 먹고 야송 미술관에 들렀다.

야송 미술관은 한국 화가 야송(野松) 이원좌(李元佐)화백의 초대형 동양화 "청량 대운도" 가 있는 전시관이다. 청량대운도는 가로 48미터 세로 6.8미터의 초대형 동양화로 그 규모 때문에 20여 년간 전시가 쉽지 않았다가 청송군이 마련한 전시관에서 2014년부터 선보이고 있다.

처음 청량대운도 전시관 입구에 들어섰을 때, 청량대운도의 거대함을 느끼기 어려웠다. 입구의 높이가 그림의 거대함을 느끼기에 턱없이 낮은 탓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 다가서서 완전히 전시관 안에 들어오자, 갑자기 2층까지 탁 트인 천장과 그 높이만큼 가득하고 좌우로 거대한 스케일의 생생한 산수화가 눈앞에 가득해졌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는 목을 거쳐 입을 타고 외부에 노출되고 말았다.

“우와!!!!”



사람과 크기 비교로 가늠하는 그림의 규모​



 

조금 더 가까이에서 찍은 부분 사진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서, 그리고 좋아한다고 하면서, 동양화에는 관심 없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에 이렇게 거대한 그림이 있는 줄 몰랐었다. 거대함에 압도 되면서 무지함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청량대운도는 거대한 크기 뿐 아니라 섬세한 묘사도 대단했다. 농담조절로 표현한 해운의 흐릿함과 원근감, 산수의 세밀한 묘사는 경이로웠다. 그림을 일부만 전시해도 작품이 될 것 같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대작을 180일 만에 완성했다는 것이다. 일찍이 거대한 과업을 완성하고 지금까지 정정하신 화백께 존경의 마음이 생겼다.

청량대운도 전시관을 나오면 옛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미술관이 바로 옆에 있었다. 이곳에는 이원좌 화백이 기증한 작품들과 국내외 유명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이 있었다. 미술관에서는 다른 작품들을 비교해보면서 이원좌 화백의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색감, 구도, 묘사등을 비교하면 그림 보는 재미가 배가 되었다.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원좌 화백께서는 문밖까지 배웅을 나와 인사와 덕담을 해주셨다. 몇 걸음 가다가 아쉬운 마음에 뒤돌아 꾸벅 인사를 드렸다. 그랬더니 화백께서 화답 인사를 해주셨다.

좋은 말씀 해주실 때 청량대운도를 세상으로 꺼낸 그 손이라도 꼭 잡아보고 올 것을......

 



 

야송미술관을 떠나 송소고택으로 향했다. 송소고택은 경주 최부자댁과 비견되는 만석꾼, 청송 심부자가 지은 집으로써 조선 시대의 민가로는 최대의 규모인 99칸의 큰 저택이다. 집은 안채, 큰 사랑채, 사랑채, 별채와 행랑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초입에는 솟을 대문이라는 홍살문이 있었다. 솟을 대문은 문간의 행랑채보다 지붕이 높고 말이나 가마가 그대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든 대문을 뜻하는데, 솟을 대문 만으로 송소고택의 규모를 알 수 있었다.

송소고택은 집의 규모뿐 아니라 안마당의 꽃과 나무를 멋스럽게 심어 잘 가꿔놓은 화단이 인상적이었다. 초입에 보이는 헛담 왼편으로 큰 사랑채가 있는데 사랑채로 가는 길목에 있는 타원형 화단이 눈에 띄었다. 화단 둘레에는 오솔길처럼 돌이 깔려 있는데, 집에 기거하던 사람들이 비 오는 날에도 신발이 젖지 않도록 화단의 돌길을 따라 걸으며 책을 보고 사색했다고 전해진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길을 따라 화단을 빙 둘러 걸어보았다.

 

화단 둘레의 돌길



비를 뜻하는 것일까. 나무들 사이에 숨어있는 개구리 모양의 돌들이 정겹다.



 

그러나 길 따라 화단을 반쯤 돌았을까, 별채로 가는 길에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어 사색을 멈추고야 말았다. 화단 가득 흐드러져있는 꽃. 꽃에 다가갔더니 그 어떤 향수보다 그윽하고 은은한 향기가 흠뻑 전해졌다. 한참 향기를 맡고 서 있으니 일행이 사진을 찍어주고 작약꽃이라 말해주었다.

 "작약(勺藥)"

그 옛날 송소고택의 사람들은 안뜰에 작약을 심어두고 한 송이씩 사랑하는 임에게 보냈을까. 아니면 담 너머 별채에 있을 과년한 아가씨에게 좋은 향이 넘나들게 하려는 뜻이었을까.

 



 

담 아래 화단 가득 화사하게 피어 있는 이 꽃을 생전 처음 보았다. 근처에 서 있을 뿐인데 은은한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 내 몸에 안긴다. 문득 고운 흰 꽃과 향기를 그대로 담아 ‘그 사람’ 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강한 햇볕으로 인해 사진에는 예쁘게 담지 못했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한참 일하며 고생하고 있을 ‘그 사람’ 에게 '향기를 함께 동봉한다'며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나누고 싶어 작약이라는 꽃을 통해 마음을 전했다.

 

“작약지증(勺藥之贈)”

여행에서 돌아와 작약을 검색해 보고 알았다. 작약지증(勺藥之贈)은 함박꽃(작약)을 선물하며 남녀 간의 정을 두텁게 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뜻을. 내 마음을. 과연 ‘그 사람’도 알까.

작약에 취해 ‘그 사람’을 생각하다 일행보다 한발 늦게 어린 자제들이 공부했다는 안채의 뒤편으로 향했다. 담벼락 너머에는 문화해설사와 사람들이 모여 있고 나는 툇마루에 홀로 앉아보았다. 고요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나의 몸을 감쌌다.

 



 

‘여기서 공부가 될까?’

눈부신 봄날 얕은 담 너머에는 도란도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불면 '쏴아아~' 하는 동산의 우거진 나무 자장가와 고운 진달래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데 따스한 햇살에 곧 잠이 들 것만 같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고즈넉한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비 오는 날도 운치 있게 사색을 즐기고, 홍살문에도 검소함을 새기던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이곳의 종복이었더라도 이 집의 일원이라는 게 뿌듯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봤다.

 

이 문을 나가면 다시 서울로......

 



 

'여행을 하면 힐링이 된다'고 한다. 나는 '여행으로 해우한다'라는 말로 이 말을 대신하고 싶다. 치료를 통한 치유는 때로 흔적을 남긴다. 어떠한 일로 인해 받은 상처가 흔적이 되어 자신이 나쁘게 변한다면 그 일에 대한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서 바람에 날려 보내야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를 상처 입히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으로 몰아세우던 근심들이 새벽의 주산지부터 시작해 옛 정취로 가득했던 고택에서 보낸 시간들로 풀어져 사라졌다. 푸른 소나무의 향처럼 청송이 마음을 맑게 해주었다.

작약을 보고도 답이 없는 ‘그 사람’은 내가 보낸 그리움이 담긴 마음을 몰랐을까. 두터운 정을 원치 않는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떠나오며 마지막으로 다시 작약의 은은한 향을 내 안에 담았다. 잘 간직하다가 진정한 사람을 만났을 때 전해주어야겠다, 고 생각하면서 문을 나섰다.

글, 사진 - 유민희(oo3171@naver.com)

 

“étranger : 이방인”

“étranger : 이방인”은 한국경제신문 HK 여행작가 아카데미(cafe.naver.com/hktouracdemy) 사람들이 펼치는 ‘여행 꿰뚫어보기’를 실천하고 나눔하기위해 탄생했습니다. 한경닷컴 스내커를 통하여 다양한 이방인의 시학이 주 1회 펼쳐집니다.  이방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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