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서 생겼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화장실 벽에는 방수가 잘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지만 방수가 된다는 탁상용 시계가 하나 걸려 있었다.

 

화장실에서 시계 볼 일이 별로 있지도 않아 건성으로 보아 오던 그 시계가 어느 때 보니까 언제부터였는지 서 있었다. 으레 그렇듯이 ‘바테리가 다 되었구나’ 하곤 아버지 때부터인지 그 전부터인지 무심코 배워온 비법, 툭 한번 건드려 보았다. 어라! 가네.

 

중뿔나게 바쁠 것도 없는데 한참을 까먹고 지내다가 화장실에서 문득 그 시계가 생각나서 쳐다보니 거 참! 잘도 가네. 그럼 왜 섰던 거야? 또 그렇게 한동안 세월이 흘렀다. 그래 그건 시간이 아니라 세월이었다. 얼마를 갔는지 셀 수가 없는 것은 누구나 세월이었다. 한번 서면 탁탁 건드려 주었고 그러면 시계는 당연한 듯 또 한동안을 잘 갔다.

 

아무 것도 아닌 것도 자주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길들여지나 보다. 이젠 당연히 화장실에 가면 그 시계를 보게 되었다. 아무리 멍청하게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언제 바테리를 끼웠는지 모르지만 처음 서 있는 것을 본지도 반년이 넘는데 아직도 잘 간다. 가끔 서게 되면 두드려 주면 되었다.

 
담배를 한 개비 다 빨면서 문득 시계가 위대했다. 누가 보지도 않고 신경도 안 써주는데 벽에 대롱대롱 걸려 그래도 제딴에는 역할을 다 한다고 죽어라고 무거운 초침을 돌리는 것이 무척 대견하고 믿음직했다. 화장실에서 이젠 그 시계가 섰나 가나를 살피는 것이 일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시간이 맞고 안 맞고는 따질 것이 못 되었다. 가는 것만이 훌륭했다.

 

그렇게 또 반년이 지났을까? 여기저기서 바람 맞고 일이 엉망진창으로 될 때 화장실에서 죽었다 살았다를 하던 그 시계를 보면서 한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한 생각이 달리 떠올랐다. 시계가 아니라 바테리인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피 한방울까지 다 쏟아내는 것은 바테리였다. 바테리가 가자고, 가야한다고, 갈 수밖에 없다고 졸라대니까 시계가 간 것이다. 아, 나보다 위대한 바테리. 아직도 살아있는 바테리. 누가 너를 이젠 쓸모 없다고 버리랴.

 

아무 약속도 이루어주지 못하고 이젠 아무 약속도 못하는 나이지만 내 너 바테리한테만은 꼭 약속 하나를 지켜주마. 너 죽으면, 너 아주 죽으면, 열 번을 건드려도 가지 않아 죽은 것이 확실해지면 그때는 내 엄숙한 마음으로 너를 고이 화단에 묻어 길이길이 기억하리.

 

변변치 않는 것들 속에서, 변변치 않은 것들 때문에, 변변치 않게 살면서, 변하는 것들 투성이 속에서, 오늘도 나는 또 변하면서, 오늘도 변하지 않는 너 위대한 바테리를 신처럼 믿으며 안간힘을 추슬러본다.

 

알림: 한 세월 지나 그 바테리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오대산 진고개 정상에 고이 묻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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