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왕'에 이끌려 평창 발왕산에서 발품을...

입력 2015-02-02 11:49 수정 2015-02-02 11:53



평창 발왕산에는 아픈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산아래 고을에 발이 크고 기골이 장대한 청년, '발왕'이 살고 있었답니다.

 

몸집이 너무 커 장가를 못 가 여러 해 애 태우던 중,

어느날 우연히 '옥녀'란 처녀를 만나 사랑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둘은 결혼을 약속하였으나 두 집안 모두 궁핍해 살 집은 고사하고 땟거리 조차 힘들었습니다.

결혼에 앞서 비용 마련을 위해 둘은 각각 南으로 東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발왕'은 제왕 고개를 넘던 중 산적을 만나게 됐고 산적들은 기골 장대한 '발왕'을 자기네 두목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관군이 산채를 기습했습니다.

'발왕'은 남쪽으로 도망치며 '옥녀'를 찾아 헤매다가 그만 큰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인근 고루포기산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옥녀'는 '발왕'을 수습해 건너편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 묻고 죽을 때까지 그의 무덤 곁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발왕'이 떨어져 죽은 산은 '발왕산'으로, '옥녀'가 무덤을 지키다 죽은 건너편 산은 '옥녀봉'으로 불리고 있답니다.



산객을 실은 버스는 발왕산 아래 마을, 곧은골 입구에 멈춰 섰습니다.

혹 '발왕'이 살았던 마을은 아닐까, 객쩍게 두리번 거려 봅니다.

조용한 마을이 일순 산객들로 번잡해졌습니다.

버스 2대, 줄잡아 80여 산객이이 마을어귀에서 복장을 갖추느라 부산스럽습니다.



맨질맨질 얼어붙은 길을 걸어 산들머리로 향합니다.

'바스락~ 바스락~' 아이젠에 얼음 바스라지는 소리가 경쾌합니다.

10여분 농로를 걸어 닿은 산 들머리에서 길은 두갈래로 나뉩니다.

곧장 능선으로 올라붙는 길과 밭을 가로질러 계곡으로 오르는 길이지요.


앞선 다른 팀들이 능선으로 올라 붙습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계곡길을 택했습니다.

눈쌓인 산자락엔 산죽이 지천입니다.



능선길을 버리고 계곡길을 택한 게 실수였을까요?

계곡을 벗어나 가파른 설사면에 붙어 희미해진 길을 찾느라 한참을 버벅대야 했습니다.

 

좀 더 고도를 높이자, 참나무, 물오리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네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쑥쑥 키를 키우며 자랍니다.

실핏줄같은 잔가지 사이로 드러난 하늘빛이 차갑습니다.

나무꼭대기 잔가지에 '겨우살이'가 제법 많이 눈에 띕니다.


높다란 나뭇가지에 기생하며 스스로 광합성하여 엽록소를 만드는 반기생식물로 사계절 푸른 잎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뇨작용과 혈압, 당뇨개선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서인지 요즘 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겨우살이 채취꾼들을 자주 만납니다.

대개 긴 장대에 낫을 달아매어 채취하더군요.



아무튼 나무를 해치지 않고 채취해야만 하는데...

오늘은 아주 몰상식한 채취 흔적을 목격하고야 말았습니다.

겨우살이 채취를 위해 잘 자란 나무를 통째로 톱으로 베어 쓰러뜨렸습니다.

톱밥이 그대로 남아 있고, 눈밭에는 겨우살이 열매의 진액이 채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젯밤에 벌어진 일 같습니다.

'지구를 떠나야야 할 몹쓸 인간'입니다.



능선에 올라서자, 멋스런 주목들이 속상한 마음을 달래 주네요.

파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고사목의 꼿꼿함에서 죽어서도 살아 있는 듯, 존재감이 느껴집니다.


뷰(view)가 좋다는 헬기장에 이르러 배낭을 내렸습니다.

용평스키장의 전망쉼터, 드래곤피크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쉬익~ 쉭' 설면을 스치는 스키의 마찰음이 귓전에 닿습니다.

 

저멀리 첩첩의 산능선이 파도처럼 일렁입니다. 無限을 떠올립니다.

상고대는 햇살에 자릴 내주고 스러져갑니다. 刹那(찰나)이죠.

刹那를 이으면 곧 永劫(영겁)이요 無限이 아닐까, 또한번 객쩍은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각설하고,

 

지난번 남덕유산에서 부러워했던 1회용 비닐텐트, 이번엔 준비해 온 일행이 있어 다섯명이 뒤집어 쓰고 들어앉아 손발 시림 없이 라면을 폭풍 흡입할 수 있었습니다.



헬기장에서 5분거리 '드래곤피크'는 동화속 나라 같습니다.

이국적인 쉼터 건물은 고사목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림을 만들고 형형색색의 스키어룩을 갖춰 입은 스키어들은 은빛 슬로프를 내달리며 짜릿함을 만끽합니다.



앞서 진행하던 일행이 허겁지겁 되돌아와 난감한 표정을 짓습니다.

슬로프 옆으로 나있는 등로로 출입할 수 없게 스키장 진행요원이 통제를 하고 있답니다.

아니, 그렇다면 걸어 오른 산객은 어디로 내려 가란 말씀?

아하, 스키어들이 이용하는 곤돌라를 유료 이용하란 말씀?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길을 만들며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잔가지 무성한 산비탈을 헤치며 나아 갈 수는 없는 일, 하여, 곤돌라가 지나는 아래를 택해 일행들이 러셀을 시작했습니다.




스키장 울타리를 따라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느라 이만저만 개고생이 아닙니다

정수리 위로 오가는 곤돌라에 느긋하게 앉은 스키어들이 발아래서 러셀하는 우리를 보며, '끌끌' 혀를 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40년 자연설이 펑펑~ 한국의 알프스, 용평리조트는 국내 최고 수준의 스키장"이라며 스키어를 유혹합니다.


초, 중, 상급, 최상급의 최다 슬로프를 자랑하는 용평리조트는 스키어가 아닌 산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에서도 단연 최상급임을 인정합니다.

그렇게 없는 길을 만들어 가며 발품을 왕창 판, 발왕산!

들머리(곧은골)에서 날머리(레인보우주차장까지 GPS가 그려낸 궤적을 보고 아연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전설 속의 '발왕'이 환생한 듯 그의 '왕발'이 뚜렷하게 지도에 그려져 있었지요.

어쩌면 처음부터 능선 길이 아닌 계곡 길로 접어든 것도, 길을 막아 놓아 길을 만들며 내려 온 것도, '발왕'의 궤적을 따르라는 산신의 계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말 산에 푹 빠져 사는 트레킹 매니아로서 산행 관련 기록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山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전문 월간지(3종:월간 봉제기술/배관기술/플랜트기술)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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