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콤플렉스

입력 2012-12-27 15:00 수정 2012-12-28 11:04


  나는 어디를 가나 보트 크루즈를 선호하는데, 정작 호수의 도시 스톡홀름에서는 「레드 콤플렉스」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선물시장 제도를 도입하기 직전으로 우리 일행은 옵션시장이 잘 발달되었던 스웨덴의 OM시장을 견학하러 갔었다.

    OM시장 제도를 통역하고 설명한 사람은 한국동란 직후 스칸디나비아 원조로 세워진 국립의료원 설계에 참여하였다는 엘리트로, 한국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우리는 짧은 여유시간을 틈타 각자 알아서 박물관을 구경하거나, 그 곳 특산물인 호박(琥珀)과 수정시장을 돌아보거나, 보트 크루즈를 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 공학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버스 안내 아주머니가 “OM시장을 설명한 그 자는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비난했다. 처음에는 그저 머나 먼 북유럽에 가서도 서로 으르렁거리는 동포들이 안쓰럽게 보였다. 일행 중 한사람이 문득“(회색분자와 접촉한) 우리는 귀국 후에 조사받을지도 모른다.”며 걱정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냉각되어 개별 행동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북한대사관이 있는 중립국에서 혼자 돌아다니다 그들과 마주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
  내 또래 대부분은 웬만한 억울한 일은 참을 수 있었지만,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듣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요즘 사람들 입에서 툭툭 튀어 나오는 빨갱이새끼라는 욕을 그 당시에 듣는다는 것은 정말 겁나는 일이었다. 어쩌면 레드 트라우마(red trauma)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2002 월드컵 당시 빨간 색깔의 붉은악마 유니폼을 보고 진짜 「빨간 악마」가 뒤에서 조종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 때 청소년기 어느 겨울 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읽으면서 적색공포(赤色恐怖)에 떨던 기억이 떠올랐다.

    근세조선 같은 단순재생산 사회에서는 한정된 재화를 차지하려고 기를 쓰고 싸우다가, 상대가 역적모의를 하는 것 같다고 임금이나 세도가에게 은밀히 고하면 치도곤(治盜棍)을 맞고 없는 죄까지 실토하다 멸문지화를 당해야 했다. 무서운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수틀리는 놈이 있으면 고등계 형사나 그 끄나풀에게 다가가 “저 자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 같다”고 눈만 꿈적거리면 끝장이다.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은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감시당하다 끌려가 고문당하고 사경을 헤매야 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자유가 있었는지 의문이 가던 자유당 때는 어떠했는가? 누군가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투서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신변은 온전할 수가 없었다. 이념과 이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까막눈이들도 말 한마디 잘못하다가 본의 아니게 빨갱이가 되면 그 인생은 종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반목과 질시의 세태에서, 버클리대의 진보주의 학자 레이코프( G. Lakoff)교수는 “억압의 주체인 북한 정권과 억압의 피해자인 북한 인민을 통틀어 하나로 지칭하는 혼란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 다원화사회에서 다른 의견, 다른 가치관을 인정하고 포용하여야 조화와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래야만 대외경쟁력은 물론 안보능력도 더욱 다져질 것임은 자명한 이치다. 밤낮없이 편 가르기를 일삼는 인사들이 입버릇처럼 내세우는 애국과 그들의 행동은 정면으로 배치된다. 스페인 내전 당시 파시스트 프랑코가 부대를 다섯으로 나누어 제 오열(五列)을 적진에 투입하여 자신을 얼통당토하지 않게 욕하게 함으로서 오히려 상대를 분열시킨 사례가 생각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당시 파시스트들은 공화주의자로 위장(camouflage)하고 쓸데없는 대립과 갈등을 조성하며 사회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졸고, 애국, 애국하지 마라 참조

    맘에 들지 않는다고 무조건 적으로 몰아세우며 반목과 충돌을 획책하는 인사들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위장망인가 아니면 콤플렉스인가? 무의식적 콤플렉스와 의식적 위장의 세계가 혼재되었는가? 먹을 것이 보이기만 하면 순식간에 달려드는 꼬락서니를 보면 그저 출세욕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않으려는 그 망나니들이 무슨 보수와 진보를 알고 주의와 주장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중상모략 아니면 욕지거리나 입에 담을 뿐이다. 진정한 대통합 시대에는, 막무가내 진영논리로 혹세무민하는 인사들이 적어도 공직을 유린하는 기회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졸고, 온고지신 - 보수와 진보 참조

  * 관련 글들은 http://easynomics.blog.me 를 클릭하면 정리되어 있습니다


증권감독원에서 증권제도연구실장, 조사부장, 조사연구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미시간 주립대 객원연구원, 이코노미스트, iweekly 편집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성도회계법인 부회장, 현재 선인장학재단 이사,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비즈니스 워치 금융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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