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의 그림 "벼 타작"에는 벌거벗다시피 한 상민, 노비들이 타작을 하고 그 옆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장죽을 입에 문 양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구한말 조선에서 이탈리아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카를로 로제타는 "양반사회의 중요한 특성은 어떠한 일도 하기 싫어하는 것"이라며 "이들을 직간접적으로 부양하여야 하는 대중에게 양반은 큰 짐이 될 수밖에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양반의 한평생', 허인욱). 양반이 되면 일은 하지 않고 이것저것 누리기만 하니 누구나 양반이 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니 도리없이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벼슬이름만 있고 사람이름은 없는 백지사령장인 공명첩(空名帖)까지 등장하였다.

  # 조선중기 이후 고달픈 백성들의 삶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군역(軍役)의 폐단이었다. 조선초기에는 소위 사대부들도 군역의무가 있었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실시되면서 양반의 군역의무는 없어지는 반면, 양민들의 부담은 그만큼 더 늘어났다. 군포를 받치고 나라에 의무를 다하면 상놈으로 천대받고, 나라에 대한 기본 의무를 비켜 가면 양반으로 우대받는 해괴한 광경이 벌어졌다. 이런 사회에서 어찌 가치관의 전도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자유당시절 나라경제가 밀수와 외화부족으로 허덕이던 때, 「양담배 몰아내기 전 국민 궐기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지금은 동대문 역사공간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각계의 우두머리들이 제각기 애국심을 호소하고 열변을 토하였다. 그런데 일제 때에는 유수의 거부였고 해방 후에는 총리자리까지 올랐던 한 인사가 단상 중앙에 앉아서 버젓이 양담배를 피는 장면을 보고 놀란 기자가 물었다. “국민들에게 양담배를 배척하자고 독려하는 자리에서 각하께서는 어떻게 양담배를 피우십니까?” 그 높은 인사는 태연하게 “이 사람아 나 혼자야 어때? 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던 어떤 의뭉한 식자(識者)는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들이 보통사람들과 같이 군복무를 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개인이나 사회를 위한 길이다.”라는 망칙한 궤변을 늘어 놓았다. 간접화법으로 자신의 병역기피 협의를 변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좋은(?) 두뇌를 자랑하는 것인지 그 속내를 모르겠다. 이 방자하고 수치심을 모르는 인사를 과연 양반으로 불러야할지, 개불상놈으로 불러야할지 모르겠다. 두렵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는 뜻의 가공가소(可恐可笑)는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여간 왕자도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대통령, 총사령관의 자식도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는 까닭이 그들의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하지 못했다.

  # 고시촌 쪽방에서 엉덩이가 헤지도록 공부를 해도 붙기 어려운 시험을 어떤 인사의 자제는 두루뭉술하다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도 언젠가 벌어졌다. 아직도 거저먹는 사람 따로 있고, 일만 하는 사람 따로 있는 "사대부와 상민" 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인가? 연고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아웃소싱 또는 인재발탁이라는 이름아래 엉뚱한 사람을 큰 자리에 앉히면 그 자리를 빼앗긴 당사자의 억울한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바라보는 조직원들의 가치관이 뒤틀리고 결국 조직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정말 무서운 일은 그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정직하게 살면 출세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생각건대, 의무와 권리가 거꾸로 뒤바뀌는 일이 거듭되고, 높은(?) 자리를 엉터리 인사가 차지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어도 한국경제는 상당한 업적을 일궈냈다. 생각건대, 힘의 질서가 아닌 신뢰의 질서가 잡힌다면 우리나라는 정말 커다란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혹자는 역사를 비하하지 말라고 하지만, 오욕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곧이곧대로 적어야 한다. 역사에 덧칠이 없어야 자부심있는 미래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어느 시인은 "아버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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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감독원에서 증권제도연구실장, 조사부장, 조사연구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미시간 주립대 객원연구원, 이코노미스트, iweekly 편집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성도회계법인 부회장, 현재 선인장학재단 이사,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비즈니스 워치 금융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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