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지대

입력 2010-01-28 09:05 수정 2010-02-05 14:20

  얼마 전 어떤 백화점에서 참기름 2병을 슬쩍한 70대 독거노인에게 자그마치 징역 2년을 선고하는 법의 심판이 있었다는 뉴스가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전과가 있는 그 노인에게 3년 이상의 징역형이 선고되어야 했지만, 사정이 참작되어 재판과정에서 2년으로 감형되었다는 신문기사가 또다시 혀를 차게 했다.

  한편에서는 파렴치범들에게 “국가발전과 경제성장에 기여할 기회를 주겠다.”면서 형량을 낮추고 유예해주거나 흐지부지하는 아량(?)이 베풀어지고 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그 오갈 데 없는 노인이 쓴 법의 굴레는 벗겨줄 수 없는가? 법에 대한 무지의 소치로 이 두 가지 현상에 대한 관계를 헤아리지 못하는 나의 뇌리에는 수십 년 전 군대생활 장면 한 토막이 떠올렸다. 

  말단졸병으로 엄동설한에 추위와 배고픔으로 시달리던 때였다. 운전병으로 복무하던 수송부대에서는 고되고 엄한 군기를 이기지 못하고 탈영과 자해 심지어 목을 맨 병사도 있었다. 당시 나 같은 신병들에게 고참병은 염라대왕 조카님과 같이 무섭고 훌륭한 분들이었다.

  어느 날 무슨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모처럼 닭고기 급식이 있었는데, 그저 닭고기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날 밤 왕고참이 닭 세 마리를 주면서 담 넘어 두 집뿐인 민가에 가서 닭볶음탕(닭도리탕)을 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희미한 호롱불아래 이글거리는 장작불과 보글보글 끓는 탕을 내려 보다가 나도 모르게 몇 숟갈 국물을 떠먹고 가슴살 두어 조각을 집어 삼켰다.

  내 입술 언저리가 빨갛게 된 것도 모르고 닭볶음 바케츠를 들고 조심스럽게 내무반에 들어갔을 때, 어느 누구도 내가 그 귀한 닭고기를 먹은 죄를 묻지 않았다. 다만 졸병시절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짬밥통에 버려진 돼지먹이 비지를 거둬 먹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던 먹성 좋은 고참이 “이 쫄병 새끼 입 좀 봐라. 혼자 다 먹고 주둥이가 새빨갛다.”라는 으스스한 농담을 했을 뿐이다.   (그 고참은 오*기 상병인데 혹시 이 글을 보고 연락하면 무엇이던 무한정 대접하겠습니다)

  그 때 그 공포의 "상하질서"와 그 노인에게 적용된 "징벌기준”을 대비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 하늘같은 고참들이 드실 귀한 음식을 “겁도 없이” 그냥 먹은 죄는 당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뒈지게 맞고 피똥을 싸야”마땅했다. 사실이지 상대적 가치로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서 그 때의 닭고기 두어 점은 아무리 낮게 쳐도 지금의 참기름 한 말 이상의 효용가치(效用價値)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먹는 죄는 없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그 배고픈 사회에서도 적어도 먹는 것 가지고는 이렇다 저렇다 따지지 않는 마지막 체면 같은 것이 있었다. 당시 까막눈을 가까스로 벗어난 젊은이도 있던 그 무지막지한 병사들 사이에서도 자부심이랄까 아니면 수치심 같은 인간 세계 밑바닥 그 무엇을 잃지 않고 있었다.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인생살이 막바지 환경에 처한 노인이 참기름 2병을 훔친 죄로 황혼기의 삶 2년을 감방에서 지내야 하는 오늘,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나의 졸병 시절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지금의 1/100을 겨우 넘는 210불 정도였다.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배운 오늘날 그 노인이 처한 질곡(桎梏)의 무대는 성장의 사각지대인가? 인권의 사각지대인가? 아니면 법의 사각지대인가?

 여기서 우리는 기업과 국가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기업은 무능력자, 조직에 해가 되는 자를 솎아내야 경쟁력을 확보하고 일류기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국가는 바보 같은 사람, 힘없는 사람, 이상한 사람, 나쁜 사람, 미운 사람까지 다 껴안아 주어야 비로소 일류국가가 된다는 점이다.

증권감독원에서 증권제도연구실장, 조사부장, 조사연구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미시간 주립대 객원연구원, 이코노미스트, iweekly 편집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성도회계법인 부회장, 현재 선인장학재단 이사,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비즈니스 워치 금융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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