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히 절망하라!

입력 2011-11-14 00:26 수정 2011-11-14 00:26
철저히 절망하라!

차라투스트라는 기존의 관습과 전통, 그리고 누군가의 명령에 순종하느니 차라리 경멸하고 절망하라고 외친다. 니체에게 ‘철저히 절망하라’는 외침은 ‘철저히 부정하라’는 외침이다. 철저한 부정이 있어야 새로운 긍정을 만날 수 있으며, 새로운 긍정은 새로운 출발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낡은 현재에 대한 철저한 경멸과 부정만이 새로운 삶을 조각해낼 수 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이 사람을 보라, p. 192). 나를 긍정하는 길은 우선 지금의 나를 부정하는 길이며, 지금의 나를 부정하는 길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길이다. 여기서의 부정은 낡은 나를 경멸하고 철저하게 절망하는 것이다. 정직한 절망만이 희망을 낚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절망의 중간이나 그 밑에 걸려 있는 절망인 경우가 많다. 절망이 절망적일수록 절망을 뒤집어 희망의 끈을 잡을 수 있다. 대충 대강 절망하면 계속해서 대충 대강 절망을 반복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나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경멸해야 처절하게 절망할 수 있으며, 절망의 끝에서 다시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다.  

"사람에게 가장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점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 20)."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즉 현실에 안주하고 고작 하루하루 먹고살면서 생존에 집착하는 나약한 인간을 청산하고 우리 모두가 이 땅에서 자력으로 달성해야 될 이상적 인간상인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에 걸쳐 있는 밧줄에서 사투를 벌이면서 몰락하고 절망하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존경할만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몰락과 절망, 경멸과 부정을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사람만이 위버멘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더욱 더 불확실해지고 밧줄 위에 매달려 사투를 벌이는 인간은 그럴수록 더 불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며 부정하고 경멸하며 환멸하는 삶이라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현실의 삶에 환멸을 느껴야 환상을 깰 수 있다. 잘못된 환상을 청산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존의 생각과 현실적 삶에 대해 처절한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환멸해야 환상을 깨고 도약을 위한 튼실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묻는다. “너는 너 자신을 멸망시킬 태풍을 네 안에 가지고 있는가?” 태풍앞에 떨고 있는 인간들에게 단도직입적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쌓은 학식과 경험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경멸하며 환멸을 느껴야 환상을 깨고 새로운 상상을 시작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지금의 나에 대해 경멸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희망이 있다는 것이며, 위대한 절망과 경멸일수록 존경받을 점이 많다는 것이다. 좌절이 없다는 것은 도전이 없었다는 반증이며, 경멸이 없다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증거다. 한계에 도전하고 경계를 넘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자신을 끊임없이 색다른 나로 변신할 수 있다. 좌절이 없다면 성취도 없다. 결핍된 상황은 수중에 있는 재료를 십분 활용해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한계가 없다면 예술은 불가능하다. 한계는 집중을 낳는다. 한계는 맞서는데 그치지 않고 협력해야 할 대상이다. 시냇물은 장애물에 부딪쳐야 노래한다.”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을 쓴 스티븐 나흐마노비치의 말이다. 한계는 한계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존재한다. 경계도 넘을 수 없는 한계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존재한다.  

삶에는 네 가지 벽이 존재한다. 첫째 나를 담금질하는 절벽(絶壁)이 곳곳에 숨어 있다. 절벽 앞에는 언제나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절망이 제일 좋아하는 벽이 절벽이다. 두 번째 벽은 장벽(障壁)이다. 꿈의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숱한 장애물이자 걸림돌이다. 걸림돌은 얼마든지 디딤돌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걸림돌과 디딤돌은 같은 돌이다. 세 번째 벽은 웬만한 노력으로는 무너지지 않는 철벽(鐵壁)이다. 어지간히 공격해서는 뚫을 수 없는 난공불락의 벽이다. 철벽은 공격수들이 가장 뚫기 어려운 벽이다. 그러나 철벽수비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공격전략을 활용하면 얼마든지 뚫을 수 있는 벽이다. 네 번째 어딘가에 홀딱 빠져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결벽(潔癖)이다. 완전히 빠지고 중독되어 있어서 결벽 증세를 보이는 심각한 질병 상태다. 결벽은 시간이 지날수록 결별하기 가장 어려운 성벽(性癖)이다. 다섯 번째 벽은 새벽이다. 희망이 가장 고대하는 벽이다. 새벽은 절벽을 넘고 장벽을 무너뜨려야 맞이할 수 있는 벽이며, 철벽을 뚫고 결벽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희망의 벽이다. 새벽은 칠흙 같은 어둠의 저편에 존재한다. ‘벽’은 다 ‘벽’이지만 ‘새벽’은 ‘새 벽’이 아니라 희망이 움트는 가능성의 ‘벽’이다. 마지막으로 개벽이 있다. 신천지가 용틀임하는 벽이며, 무한한 가능성의 문이 열리는 벽이며, 전대미문의 창조가 시작되는 벽이다.  

삶은 ‘장벽’을 넘고 ‘절벽’을 건너는 고난의 연속입니다. 꿈의 목적지는 언제나 ‘장벽’ 너머에 존재하고 ‘절벽’ 밑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벽’을 넘고 ‘절벽’을 건너야 ‘새벽’을 맞이할 수 있고, ‘개벽’은 주로 어둔 밤의 끝자락인 ‘새벽’에 일어납니다. '절벽'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싹은 자란다. '절망'과 좌절로 삶을 포기한다면 거기서 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살아야겠다는 '야망'으로 '도전'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도약'의 기회를 가져다준다. 위대한 작품을 쓴 작가, 화가, 음악가는 모두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꿈꿀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불길'을 따라 '불꽃'을 피운 사람이다. '불꽃'이 피기 위해서는 '불길'이 일기 시작해야 되고, '불길'이 일어나려면 '불씨'가 있어야 한다. 불씨는 꿈이고 불길은 열정이며 불꽃은 보람찬 성취다. ‘불씨’가 없으면 ‘불꽃’이 피지 않듯이 꿈이 없으면 보람찬 성취를 이룰 수 없다. 보람찬 성취는 숱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 태어난다. ‘불면(不眠)의 얼룩’속에서 ‘불멸(不滅)의 무늬’가 탄생한다. '불면'의 밤 속에서 '불멸'의 작품이 잉태된다.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으로 만들어진 ‘얼룩’이 아름다운 작품의 ‘무늬’로 탄생한다. 얼룩진 삶에서 묻어나는 향기가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된다. 좌절과 절망의 ‘얼룩’, 시련과 역경의 ‘얼룩’이 희망과 도전, 꿈과 성취의 ‘무늬’로 탄생하는 것이다.


한양대학교에서 교육공학으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Florida State University에서 Instructional Systems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즐거운 학습과 건강한 지식을 창조하여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5년간 경험한 후 현장에 현실이 있고 현실 속에 진실과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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