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네 가지 의미

입력 2010-01-04 21:10 수정 2010-01-05 13:09


‘아름다움’의 네 가지 의미

첫째, ‘아름다움’은 ‘앓음다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피워낸 꽃이라고 합니다. 천영희 시인의 말입니다. 상처를 알고 슬픔을 삭인 사람만이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앓고 난 뒤의 ‘사람다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앓는 동안 아픔의 상처가 흔적이 되고 그 흔적은 시간과 더불어 아름다운 추억이 됩니다. 한 해 동안 우리 모두는 많이 아팠습니다. 그 아픔의 넓이와 깊이, 종류와 성격은 모두 다르지만 그 아픔이 우리 모두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압니다. 아파 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이 주는 고통을 감싸 안아줄 수 있습니다. 진주조개의 영롱함과 아름다움은 진주조개 속살에 생긴 상처를 메워가면서 탄생된다고 합니다. 진주의 아름다움은 진주조개가 견뎌낸 자신의 상처 덕분입니다. 상처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상처가 스승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말입니다. 상처로부터 배우는 사람, 아픔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아름다움의 어원적 의미는 포옹하다를 의미하는 ‘안다’에 나왔습니다. ‘안다’의 접미사 ‘음’이 붙어서 ‘안음’이라는 말이 생겼고, 이것이 다시 운율적 매끄러움을 위해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탄생했다는 주장입니다.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분수를 아는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분수를 저버리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 아름답지 못하고 추해 보입니다. 내가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분수를 알아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따뜻한 가슴을 갖고 있습니다. 한 겨울의 추위가 아무리 추워도 따뜻한 가슴의 온기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내 품의 따뜻한 온기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관계,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안아 줄 수 있는 관계가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안음의 대상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자연 삼라만상 모든 것이 내 뜨거운 가슴의 언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감성적 느낌이 머리로 분석하는 논리적 앎을 이깁니다. 가슴은 따뜻하지만 머리는 차갑습니다. 머리로 계산하기 이전에 가슴으로 안아야 됩니다. 

 세 번째 ‘아름답다’의 의미는 ‘알밤답다’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밤은 밤까시로 뒤덮여 있습니다. 접근 자체를 거부하는 밤송이 속에 먹음직스러운 알밤이 숨어 있습니다. 알밤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밤송이를 까야 됩니다. 험상궂은 밤송이 안에 너무도 아름다운 밤톨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밤톨을 그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밤톨이 매끄럽지만 딱딱한 껍질로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밤톨을 덮고 있는 껍질을 까면 이제 ‘보늬’라는 또 다른 껍질로 싸여 있습니다. 보늬는 밤톨 껍질보다 훨씬 보드랍지만 그냥 먹기에는 텁텁한 맛을 내기에 힘들지만 벗겨내야 합니다. 보늬는 밤톨에 단단히 달라붙어서 생각만큼 쉽게 벗겨지지 않습니다. 착 달라붙어서 밤톨을 감싸고 있는 보늬를 정성스럽게 벗겨내야 비로소 하얀 속살을 지닌 알밤이 정체를 드러낸다. 저마다 깊은 뜻을 지닌 세 겹의 껍질을 각각 다른 방법으로 벗겨내야 그토록 간절히 보고 싶었던 알밤이 모습을 드러낸다.

“겉모습으로 보고는 험상궂어서 쉽게 다가갈 마음도 먹기 어려운 밤송이를 한사코 벗겨내고, 한결 나아졌지만 그래도 매끄럽고 딱딱한 밤톨의 껍질도 애써 까내고, 한결 더 부드러워졌지만 텁텁하여 입에 대기 어려운 보늬까지 벗겨내고야 만날 수 있는 알밤. 세 겹의 만만치 않은 껍질을 벗기고 들어온 이에게는 하얗고 깨끗하고 단단한 속살과 고소하고 달콤한 맛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알밤. 그런 알밤은 온통 보얀 살결로만 이루어져서 어디를 뒤져 보아도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하다. 겉으로 드러내어 떠벌리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좀처럼 닿아볼 수 없도록 겹겹이 깊숙하게 감추어진 알밤. 이런 알밤을 우리 겨레는 아름다움의 참모습으로 알고, 이런 알밤다우면 그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 여겼다”(김수업, 2009, 우리말은 서럽다, p.297).

 알밤의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습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시간과 더불어 향기를 뿜어냅니다. 자기만의 색깔과 향기는 각고의 노력 끝에 생기는 알밤과 같습니다. 알밤의 아름다움은 밤의 알맹이에서 비롯됩니다. 껍질과 껍데기로 뒤덮인 허식과 치장을 걷어내고 드러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핵심은 단순하지만 언제나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밤송이-밤톨 껍질-보늬를 벗겨내야 비로소 드러나는 알밤의 아름다움에서 우리는 자기 정체성의 본질을 배워야 됩니다. 자기 정체성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새롭게 형성되어 나갑니다.

네 번째 ‘아름답다’의 의미는 ‘알다’(知)라는 동사 어간에 ‘음’ 접미사가 붙어서 생겼다고 합니다. ‘알음’(知)에 ‘답다’ 접미사가 붙어서 생겼다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아름답다’의 어원에서 보면 아는(知)것이 아름다움의 본질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아름다운’ 사람은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아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추함’이 아니라 ‘모름다움’이라고 합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말씀입니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고,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추한 사람입니다. 무엇인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나는 사물과 개념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근원적인 탐구의욕을 갖고 있는가? 아름다움은 지식은 숙지성(熟知性)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지식이 얼마나 숙성되었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지식 여부가 결정됩니다. 나의 지식은 내가 숙성시켜야 내가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숙성의 아름다움 속에서 성숙한 원숙미가 드러납니다. 나는 도처에 산재한 정보를 내 지식으로 숙성시켜 내면화, 체화, 육화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안아 줄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 안아주다가 큰 코 다칠 수 있습니다. 상대를 제대로 모르면 안아줄 수 없습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주기 위해서 우리는 상대방의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아픔은 사연을 들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사연과 배경이 깃들어있는 아픔을 깊이 보듬어줄 수 있어야 비로소 상대를 안아줄 수 있습니다.
한양대학교에서 교육공학으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Florida State University에서 Instructional Systems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즐거운 학습과 건강한 지식을 창조하여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5년간 경험한 후 현장에 현실이 있고 현실 속에 진실과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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