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칠하기.

입력 2007-10-22 00:40 수정 2007-10-22 00:40
그림을 배우며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검은색의 힘은 너무나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밝은 색을 조금 어둡게 만들기 위해 검은색을 섞으려 할 때, 정말 조금 섞었다고 생각해도 지나치게 어두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럴 때는 아예 팔레트의 다른 부분에서 다시 색을 섞어야지, 밝은 색을 더 섞어서 색상을 맞추려면 필요한 물감보다 몇 배는 더 물감을 낭비해야만 합니다. 자신이 검은색처럼 강한 힘을 가졌다면 그 힘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은 너무 서툴러서 그런지 두 가지 이상의 색을 섞을 때도 원하는 색을 얻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색을 섞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뭔가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자신있는 것은 그림 그리기 준비 작업으로, 유화 물감에 천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캔버스에 젯소를 바르는 것입니다.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신나는 일입니다.

 

제가 다른 그림보다 유화 그리기를 좋아하는 것은, 제가 해본 다른 작업들에 비해 너무나 자유롭고 표현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잘하지는 못하지만 적성에 맞는 느낌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입니다. 성격상 아주 자세하고 날카로운 표현이 어렵다는 것에 불만이 있기는 해도 다른 부분에서 얻어지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세상 어떤 일도 모든 부분을 만족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어느 정도 물러서는 것에는 익숙한가 봅니다.

 

유화의 여러가지 매력중에서 색 위에 다른 색을 덧칠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고흐의 ‘계곡’이라는 그림을 엑스레이 촬영하여 밑에 있는 ‘야생식물’을 발견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야생식물’은 스케치만 있고 그림이 없어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칠한 색이 마른 위에 다른 색을 칠할 수 있는 것은, 그리는 저에게 커다란 자유와 안도를 줍니다. 수채화처럼 스케치한 연필 선이 다 보이는 것 자체가 매력인 그림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편안함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제가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책상 한쪽을 싹 치우고 유화용품들을 사들였습니다. 일하다가 언제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림을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 댁에서 이젤까지 하나 얻어다 세워놓으니 보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습니다.

 

세상사도 유화처럼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덧칠 할 수 있다면 언제 어떤 모습을 다른 색으로 채울지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아무리 위에다 다른 색을 칠해도 밑에는 먼저 색들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도 그렇게 여러겹 덧칠해서 보여주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유화보다는 수채화처럼 밑이 다 보이는 편이 좋을 것도 같습니다.
제 가슴이 느끼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여러분의 마음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머리로 계산하고 이익부터 따지는 문명을 버리고, 가슴으로 생각하고 심장으로 기억하는 새로운 문명을 여러분과 함께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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